Wednesday, November 26, 2008

Tuesday, November 11, 2008

Thursday, November 6, 2008

<누가복음 15:11 - 15:32> 잃어버린 두 아들

이 비유는 보통 ‘탕자의 비유’라고 하지만, 그것은 이 비유를 잘못 이해하는 데로 이끌고 같다. 왜냐하면 이것은 ‘두 아들을 가진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 요점은 부분적으로는 이 두 아들을 비교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의 중심 논제는 인간관계이다. 배경은 친숙한 한 가정 상황이다. 두 자녀는 서로가 너무 다르다. 하나는 책임감이 있고, 가정을 사랑하며, 부지런하다. 다른 하나는 충동적이고, 조금이라도 매이지 않으려고 한다. 둘 다 서로에 대해서는 냉소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며, 사이가 벌어져 있다. 그 둘의 공통된 운명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이 두 형제를 대조할 수 없다. 그들은 모두 잃어버린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작은 아들이 잃어버린 아들임을 잘 알고 있다(24, 32절). 그가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났다는 것은 자기 아버지와의 단절된 관계를 잘 나타내 준다. 그 결과 그는 사회적으로 멸시를 당하고, 도덕적으로 그리고 의식적( )으로 부정하게 된다. 거기다가 그는 자기의 가치를 모두 잃어 버린다(19절). 그의 아버지가 그를 일컬어 죽었다고 할 때(24절), 아버지는 마치 그가 죽었다는 듯이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그가 자멸의 길에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큰아들도 역시 잃어버린 아들이었다. 큰아들은 집을 떠난 일은 없었으며, 이것은 헌신과 정직의 모델이었다. 큰아들은 자기가 가정의 복지에 기여해 왔으므로 그만한 신분과 기업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확신하였다. 그런데 그의 동생이 돌아오자 자만심이 드러났다. 그는 인색함과 증오감 때문에, 연민의 정이 없이 마음이 냉랭했기 때문에 잃어버린 아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아들이었다. 뭐라고 해도 그들은 같은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둘 다 아버지의 사랑을 요구할 권리를 갖고 있었지만, 둘 다 그 사랑을 과소평가하였다. 둘째 아들은 품꾼으로서 아버지를 고용주로 모시고 그 아래서 일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17-19절). 그러나 그는 아들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발견하게 된다. 아버지 앞에서 채 말도 끝내기 전에, 아버지는 아무 꾸지람도 하지 않고서 그를 맞아 준다(21, 22절). 큰아들은 아들의 신분을 열심히 일을 해서 얻는 계약으로 본다(29절). 그리고 그 계약을 깬 둘째 아들을 징벌할 것을 요구한다(30절). 두 아들 다 아들의 신분이 자기들의 공로보다는 아버지의 사랑의 능력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이야기 마지막에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가서 그들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데리고 오려고 노력하는 것은, 두 아들이 모두 실패했다는 것과 아버지의 관대함을 잘 보여준다(20, 28절). 그들은 모두 선택을 해야 했다. 그 이야기는 작은아들이 집을 떠나기로 선택한 것으로 시작한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잃어 버릴 것을 감수한 사랑으로 그 선택을 존중해 준다. 나중에 둘째 아들이 집으로 다시 돌아오기로 한 결정은 큰아들로 하여금 선택을 하게 만든다. 동생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으니 혼자 나가 살까? 같이 살되 형제 관계를 그냥 부인하고 살까(30, 32절)? 만일 그렇다면 큰아들은 아들의 신분은 잃지 않게 될는지는 몰라도 그것을 누릴 생각은 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듣는 사람들에게 대답을 하도록 남겨 두시는 질문이다.

누가복음 15장 주석

누가복음 15장 주석 1

누가복음 15장 주석 2

누가복음 15장 주석 3

Friday, October 31, 2008

<마태복음 4:1 - 4:11> 예수의 시험

이 구절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다. 이스라엘이 광야40년 동안 실패헌 것에 반하여, 예수께서는 광야40일 동안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새 이스라엘의 질 대표자임을 제시하고 있는가? 아니면, 마귀의 시험에 떨어져 온 인류에게 파멸을 가져 온 아담과 오히려 승리하신 예수를 대비시키고 있는가? 아니면, 세례를 빈 은 후, 마귀의 훼방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성취하도록 시험받은 육체를 입으신 메시야를 묘사하는가? 심사숙고해 보면 이 세 가지 견해가 다 필요하고, 또 상호 연관됨을 알 수 있다.

예수는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메시야로 왔다. 그의 승리를 통하여 그 나라 는 이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자기들의 임무를 성취해야 할 것이다(예수께서 시험에 이기시면서 사용하신 말씀들이 모두 신명기서라는 것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3; 6:16;6:13. 이것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들이다). 그러나 예수는 온 세상을 위한 메시야이다. 따라서, 그는 모든 사람이 실패한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순종을, 또 모든 인류를 위하여 자신을 죽음에 내어 주는 순종을 실현할 둘째 아담으로 이 땅에 오셨다. 따라서, 예수는 메시야로서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그는 마귀와 결전을 벌일 전투지로 성령에 이끌려 당당히 나아가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먼저 마귀의 통치와 죄의 세력을 격파하는 일을 통하여 을 수 있도록 시험을 받으신 것이다(요 12:31-32을 보라).

마태복음 4장 주석


마태복음 4장 주석 1

마태복음 4장 주석 2

마태복음 4장 주석 3

Thursday, October 23, 2008

주님 다시 오실 때 까지


<사무엘하 9:1 - 10:19> 9,10장 므비보셋

왕궁의 일상생활에 관한 자세한 기록으로부터 이제 우리는 때때로 나타나는바 성경상의 목적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듯한 일련의 이야기를 접한다. 그러나 그렇게 보일 뿐이지 실상은 그 이야기는 아주 정선된 것으로 ‘누가 다윗을 이을 것인가?’라는 물음에 집중되어 있다. 소위 ‘계승 설화’는 열왕기상2:12에서 결론이 날 때까지 꾸준히 계속된다. 열왕기상2:12에서는 솔로몬이 다윗의 보좌에 올라 그의 나라를 굳게 세우게 된다. 계승 문제와 함께 다루어지고 있는 또 다른 중요한 주제는 다윗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우리아를 죽인 후 칼이 다윗의 집을 떠나지 않는데, 다윗이 죽은 뒤에조차도 그러하다. 이제 21-24장을 제외하고는 이야기가 이 두 목적을 보여 주는 왕가 생활의 주요 사건들을 따라 전개된다.

9장에서는 요나단에 대한 사랑 때문에 사울가에 쏟는 다윗의 관심이 이야기된다. 그의 이런 행동에서 부수적으로 얻는 바는 사울의 유일한 합법적 계승자들을 예루살렘에 거하게 함으로써 왕국을 다시 찾고자 하는 기회를 전혀 주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얄궂게도 다윗의 왕좌를 잠시 탈취한 자는 다윗 자신의 아들이다. 21장의 이야기는 벌써 일어난 사건이고, 필시 이 사건 때문에 요나단을 위해 그 후손을 서둘러 찾아서 그에게 큰 호의를 베풀게 되었을 것으로 가정해야만 된다.

암몬 자손과의 싸움(10장)은 다윗이 싸운 여느 전쟁보다도 더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다음 장들에서 이렇게 한 이유가 분명히 드러난다. 암몬 자손들이 다윗의 사자들에게 한 행동은 그 당시에 할 수 있는 최대의 모욕이었다. 전쟁이 곧 일어나게 되자 그들은 용병(아람인)을 고용해서 이스라엘을 대항하도록 했다. 그래서 요압은 군대를 나누어 그들 사이에 연락을 확실하게 취하도록 하면서, 일부는 훤히 트인 지역에서 싸우고, 일부는 랍바 성의 군사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9-14절). 아람인이 패주하자, 요압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14절).

다음 구절들에서(15-19절) 하닷에셀이 다윗과 전쟁을 벌인 것이 나온다. 아람 동맹군을 모아서 다윗과 그 군대에 대항했으나 전혀 적수가 안 되었다. 그들은 패하게 되자 화친하였다. 구약성경에서 수리아인으로도 알려진 아람인은 메소포타미아의 앗수르인과는 점차 구별되어지게 된다. 이 시대 이전에는 아람인들은 앗수르인 근처에 살았다. 이 집단은 둘로 나뉘어졌다. 한쪽은 남쪽으로 이주했고, 나머지 한쪽은 앗수르 근처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에 남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남방으로의 이주와 관련이 있다. 후에 그들은 다메섹을 수도로 하는 강력한 왕국으로 통합되었다.

사무엘하 9장 주석


사무엘하 9장 주석 1

사무엘하 9장 주석 2

사무엘하 9장 주석 3

Wednesday, October 15, 2008

아름다운 찬양모음





01. 진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02. 예수 이름 불러봅니다/이종익
03. 파송의 노래
04. 바람속의 음성/시와 그림 3집
05. 상처입은 치유자/김도균 1집
06. 주님의 숲/사랑이야기2집
07. 송정미5집/친구
08. 나의 슬픔 변하여/김동균
09. 조수아 2집/약할때강함되시네
10. 보혈을 지나/김도훈

11. 여호와 우리 주여/박종호
12. 내 이름 아시죠/Disciples 1집
13. 나 약해있을때에도/Story-2
14. 나의 안에 거하라/류수영 1집
15. 은혜의 이슬/소리엘
16. JOY/소리엘
17. 주 하나님 간절히 바랍니다/송정미
18 .주만 바라볼지라
19. 빈들에 마른 풀 같이
20.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21.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22. 이산지를 내게 주소서/믿음의 가정(남편을위한)
23. 야베스의 기도/장윤영
24. 유 스마일 돈 크라이/한스밴드
25. 내 이름 아시죠/믿음의 가정(자녀를 위한)
26. 예수 경배하리/올네이션스 침묵기도 5집
27. 주께 나아가세/올네이션스 침묵기도 6집
28. 보혈을 지나/김도훈 워십 2집
29. 온 천하 만물 우러러, 참 아름다와라/송정미 3집
30. 아 하나님의 은혜로/한국찬송가전집

31. 힘들어 혼자 울고 있을때/유선미
32.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바이올린 연주
33. 견딜만한 아픔을 주시는 이/신형원
34.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예수원 가는길
35. 야곱의 축복
36. 예수/에이멘 5집
37. 주님의 시간에
38. 호산나(약한나로 강하게)
39. 우리우리 주님은/소리엘
40. 베드로의 고백/박종윤,김석균

41. 새벽날개 1/박종호
42. 다윗과 요나단/요한의 아들 시몬아
43. 그 사랑 흘러 흘러/헌신 2000
44. 주여 이 죄인이/전용대
45. 구원의 축복을 노래하자/최미3
46. 당신을 위한 사랑이죠/동방현주
47. 나의 마음을 정금과 같이/유다지파
48. 오늘 / 김석균
49. 멈출 수 없는 사랑
50. 내 안에 사는 이/마음의 고백 2집

날마다


<요한복음 11:17 - 11:27> 일곱 번째 ‘표적’: 나사로를 살리심

‘나흘’(17절)은 나름대로의 충분한 의미를 가지는 기간이었다. 그 당시 민간에는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사람을 몸에 머물다가 떠난다는 신앙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흘째 되는 그 날에는 나사로가 정말로 죽었다는 것이 기정사실이 되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죽은 자의 집을 방문에서 유가족을 위로하는 것을 중요한 의무로 생각했던 까닭에, 나사로의 집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와 있었다(19절). 예수님은 마중나온 마르다에게 진심어린 위로의 말씀을 하셨다. 하지만 그것은 애도의 말씀은 아니었다.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이라는 말로 서운한 빛을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는 존경하는 선생님께 대한 간절한 믿음이 담겨 있었다. 물론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39절). 예수님은 마지막 날 모든 사람이 부활할 것이라는 바리새인들의 신앙을 가지고 있던 마르다에게, 삶을 변화시키는 진리를 가르치신다. 예수님은 그렇게 먼 미래에 대한 막연한 소망이 이제 막을 내렸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부활과 생명이 의미하던 모든 것이 당신 안에 있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단순히 생명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생명이라는 말씀이다. “나는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비록 육체의 죽음을 경험하더라도 곧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육체의 죽음이란 이제 지평선으로 들어가는 문에 불과하다. 그들이 향해 가는 곳은 해지는 곳이 아닌 해 돋는 곳이다.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부터 죽음이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간다’(모리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더욱 강조하시기 위해서 26절과 같은 역설적인 말씀을 하신다. 과연 신자에게 대해서는 육체의 죽음이 그 실체와 최종성을 잃는 것이다.

마르다는 과연 이 엄청난 새로운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을까? 그녀는 매우 강조적인 어조로‘내가 믿나이다’라고 대답한다(27절)-헬라어에서는 동사에 주어의 인칭이 나타나므로 강조할 목적 이외에는 주어를 따로 표기하지 않는다. 또한 ‘믿나이다’라고 했을 때 그 말이 현재시제로 씌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실제로는 완료형으로 씌어서, 그것이 ‘일단 생긴 뒤로는 영원히 남아 있는 믿음임을 보여 준다’(모리스). 마르다는 예수께서 그리스도 곧 메시야임과, 하나님의 아들임(1:34,49;20:31)을 믿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 온 분으로 믿었다는 말이다.

<요한복음 11:28 - 11:37> 슬픔을 아시는 구주

본문에서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깊은 동정심을 품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분의(그리고 하나님의)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 보게 된다(그것은 또한 우리 모두를 향해 품으신 마음이기도 하다). 이 모습은 신들이 ‘고립되고, 열정도 없고, 동정심도 없는’(바클레이), 한마디로 감정이 없는 줄로 알고 있던 헬라의 독자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계시였다. (a)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사람을 보내 마리아가 집에 가득 모인 호곡하는 사람들에게서 떠나 잠시라도 자기와 함께 있도록 하신다(28절). (b) 예수님은 마리아와 그녀를 따라온 자들이 슬피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셨다. (c) 나사로가 묻힌 곳에 함께 가자는 말씀을 들으실 때도 눈물을 흘리셨다. (d) 무덤 앞에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통분히 여기셨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으나 이 모든 일이 있은 후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셨다. 이로 보건대, 그 기적은 단순히 기계적인 행위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그 분은 진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신 분이다(사53:4;마8:17). 그 권능의 역사 하나 하나마다 그 분에게 어떤 대가를 요구했다(막 5:30).

마르다가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른 데에서(28절), 우리는 그 분이 베다니의 이 가정을 성경에 기록된 것 이외에도 여러 차례 방문하셨음을 다시 한 번 짐작하게 된다. 예수님이 그 여인들에게 랍비가 되어 주신 이 사실은, 그 당시 여자들을 가르치기를 거부했던 랍비들의 태도와는 크게 대조된다. 그러나 이때는 그들을 조용히 가르칠 상황이 아니었다. 그 집은 사람들로 북적대고 호곡소리로 가득했다. (이런 광경은 35절에서 보는 대로 예수께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과 대조된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셨는데(33절), 이것은 전에 없던 강렬한 감정의 표시이다(타스커). ‘그것은 예수께서 사람들의 운명에 깊이 가담하사 친구들의 슬픔을 자기의 슬픔으로 삼으셨음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모리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을 볼 때, 죽음의 권세를 가진 자와의 싸움을 눈앞에 두고 계시던 상황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참조.12:27;13:21). 예수님은 결전을 예비하는 전사(戰士)로서 나사로의 무덤을 향해 가셨다(칼빈).

<요한복음 11:38 - 11:44> 예수님이 죽음을 몰아내시다

어떤 문학작품이라도 능가할 이 드라마를 기록하는 데에는 오직 열 일곱 절이 씌었을 뿐이다. 요한의 글은 꼭 필요한 내용만 실으므로써 눈에 띄게 간결하다. 당시의 무덤은 바위를 앞에서 깊이 파내고, 입구는 크고 평평한 돌로 막아 놓은 형태였던 것의 거의 분명하다. 예수님은 무덤 앞에 이르시자 다시 심령에 통분함을 느끼셨지만, 지체하지 않으시고 무덤을 막은 돌을 치우라고 하셨다. 그 순간 전율을 일으킬 정도로 경이로운 정적(靜寂)이 있었으리라고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정적을 깨고 마르다가 합리적인 이의를 제기했다(39절)- 예수님께 대한 그녀의 믿음은 한이 없었으나, 반면에 분명치 못했다. 예수님은 얼마전에 사람을 보내 그녀에게 분명히 하신 말씀(4절)을 상기시키신다. 예수님은 마르다 역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동일한 목적에 생각이 고정되어 있기를 바라셨다. 예수님이 지금 하시려는 일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또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권능을 사람들 앞에 장엄하게 나타내시려는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들에게 보여 깨닫게 하시려는 데에도 그 목적이 있었다. ‘군중들은 그 기적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그 기적의 진정한 의미 곧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모리스).

이 일을 염두에 두고서, 예수님은 눈을 들고서(아마 큰 소리로)항상 아버지와 나누시던 대화의 일부인 것이 거의 틀림없는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은 먼저 아버지께서 기도를 들어 주신 것을 감사하신다(41절)-기록되지는 않았으나, 아마 이 상황에 처음 임하셨을 때 기도를 하신 것 같다. 그러고는 아버지께서 항상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확신을 표하신다. 그 분은 항상 아버지와 함께 고통을 나누시며 대신 일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렇게 주위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기도하신 것은, 자신이 스스로를 위해서 일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요 대리인임을 깨닫게 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요한은 기적을 기록하기에 앞서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하기를 바란다. 그런 뒤, 예수님은 큰소리로 나사로를 부르셨다(43절). 이렇게 함으로써 주위의 모든 사람이 그 소리를 들었고, 나사로가 살아난 원인에 대해서 이론(異論)이 생길 여지가 없었다(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시기 전에는 이렇게 큰 소리를 사용하시지 않으셨다). 그 소리를 듣고 죽은 자가 무덤에서 걸어 나왔다-그의 생명은 사망과 음부의 열쇠(계 1:18)를 쥔 분에 의해서 되돌아온 것이다. 예수님은 오직 그의 대권만을 행사하셨다. 경외심에 사로잡혀 넋을 잃고 바라보던 나사로의 친구들은 주님의 말씀에 정신을 차리고 나사로의 목에서 붕대를 풀어 주었다.

요한복음 11장 주석


요한복음 11장 주석 1

요한복음 11장 주석 2

요한복음 11장 주석 3

Friday, September 19, 2008

절망의 골짜기에 부는 생기

☞ 마른 뼈 골짜기(37:1~10)
하나님은 에스겔을 한 골짜기로 데려가셨습니다. 그곳은 치열한 전투로 몰살된 시신들이 마른 뼈가 되어 널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3절)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실낱 같은 희 망마저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에스겔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께서 아시나이다”(3절). 인간의 편에서 보면 절망뿐이지만,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희망이 있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에게 믿음의 행동을 요구하셨습니다. ‘대언하라 …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어떤 절망도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사랑을 소멸시키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마른 뼈들로 군대를 만드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생명의 샘물을 퍼 올리시는 분입니다.

☞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37:11~14)
하 나님의 말씀은 결코 허공을 치지 않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고통 당하고 절망하는 그분의 백성을 향한 사랑의 권면입니다. 말씀은 생명이고 구원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포로 생활로 인해 지쳐 자포자기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강하게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덤 같은 현실에서 나와 약속의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명예를 걸고 그분의 백성을 향한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결코 식언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나타내시기 위해서라도 그분의 백성을 절망에서 건져 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때 구원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 마른 뼈처럼 느껴질 때
‘마른 뼈’의 심정은 누구나 한 번쯤 겪는다. 잔잔할 날이 없는 직장 생활, 가정의 짐이나 자녀의 반항, 고통으로 신음하는 몸 등이 모두 마른 뼈의 상태를 초래한다. 삶의 예기치 못한 반전, 안팎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혹평도 우리를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간다. 그럴 때 우리는 기쁨이나 희망 없이 그냥 질질 끌려 다닌다. 그러면 성장이나 대인 관계를 위해 노력하려는 의욕도 상실하게 된다.
하루가 시작되기 전에 지친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날 때면 우리는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고이 품어 주시며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는 하나님을 그려 볼 수 있다. 우리는 하루를 사는 중에도 잠시 멈추고 자신의 지친 호흡에 주목해 볼 수 있다. 이런 잠깐의 시간들이 우리를 생명의 호흡 되시는 하나님과 이어 준다. 마른 뼈 안에 생명이 숨어 있다고 믿기가 항상 쉽지만은 않다. 마른 뼈가 다시 춤추게 될 것을 믿으려면 큰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에 대해 인내하는 것도 그중에 하나다.
우리는 마른 뼈의 심정에 부딪힐 때마다 인내와 희망을 품고 죽음의 골짜기에 들어서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새로운 삶을 창조하도록 도우신다. 우리의 감정과 행동을 낡은 틀에 머물게 할 필요가 없다. 생기의 창조자, 생명을 주시는 그분께 우리 자신을 드리자. 이 경험은 우리를 하나님의 심장 속으로 더 깊이 이끌어 줄 것이다.

<에스겔 37:1 - 37:14> 죽음에서 생명으로

에스겔서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 환상은 동료 포로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우리의 뼈들은 말랐고 ..."(11절)라는 말과 연결되었다. 절망에 대한 이 생생한 표현은 예루살렘이 함락된 직후, 그러니까 거짓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고, 에스겔의 결정적인 희망의 가르침이 영향을 주지 않던 시기를 암시한다. 14절은 36:27이 이미 알려졌음을 암시한다.

여호와의 손에 사로잡힌 선지자는 맨 처음 사명을 받았던(3:22) 골짜기 혹은 들(RSV 난하주)로 다시 이끌림을 받는다. 그곳에는 이미 오래 전에 살과 골수가 사라져버린 사람 뼈들로 가득했다. 어디를 가나 보이는 것은 죽음뿐이었다. 그 뼈들이 다시 살 수 있겠느냐는 여호와의 질문(3절)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제기했으나 아무런 분명한 대답을 받지 못했던 질문이었다(비교, 욥 14:14). 이 환상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에스겔을 시켜서 이 마른 뼈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게 하신다. 그 말씀은 능력이 있어서 그대로 이루어진다. 뼈들이 모여 골격을 이루고, 힘줄과 살이 그 위에 붙되 다만 생기만 없을 뿐이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지시대로 생기(히브리어, 루아흐. '생기'와 '바람'을 모두 뜻함)를 부르며, 그 결과 죽음을 당한 사람들이 다시금 산 군대가 된다(10절). 참으로 역동적인 부활 장면이다.

그러나 이 환상에 대한 해석(11-14절)은 그 의미를 죽은 사람들에게 적용하지 않고 이스라엘 족속의 살아있는 백성에게 적용한다. 당시에 알려진 세계에 흩어진 백성, 특히 에스겔이 목회하던, 바벨론에서 송장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고 불평하던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이다. 그 환상은 그들에게 유다로 돌아가는 것이 진짜일 것임을 확신시켜 주되, 바벨론이라는 무덤을 열고 그들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신(神)께서 하시는 일임을 깨닫게 해 준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은 그 땅에서 미래가 있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이루어진 것만큼 좋은 일이며(14절), 이제 희망을 가질 이유가 있다. 하지만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이와같은 에스겔의 복음을 듣게 되기에 앞서 깊은 절망을 겪어야만 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유익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비추어볼 때 그 환상은 에스겔이 깨달을 수 있었던 최대한의 내용보다 훨씬 놀라운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고전 15:51-57).

에스겔 37장 주석


에스겔 37장 주석 1

에스겔 37장 주석 2

에스겔 37장 주석 3

Wednesday, September 10, 2008

<사무엘상 2:12 - 2:36> 하나님께서 말씀하심

이제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숨 가쁘게 진행된다: 사무엘의 출현과 소명, 엘리 집안의 몰락과 배척당함. 본문은 세 단락으로 나뉘어진다: 엘리의 아들들이 죄; 사무엘과 그 어머니; 엘리에게 온 하나님의 사자. 사무엘서의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는 흡니와 비느하스의 부도덕한 행위를 이야기해 가는 가운데 유쾌한 이야기를 삽입함으로 아름답게 구성되어 있다. 소년 사무엘은 제사장 복장을 하였으며(18절), 그 어머니가 매년 새옷을 지어다 주었다. 엘리의 축복을 받았고(20절), 한나는 여호와의 은총의 표시로서 다른 자녀를 얻었다(21절). 사무엘의 성장을 언급하면서 26절에서는 그가 신체적인 성장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았다는 것도 첨가하고 있다(눅2:52의 예수님과 비교해 보라).

여 호와께 대한 이런 은밀하게 계속되는 헌신은 엘리의 아들들의 악한 삶을 뚫고 비치는 한 줄기 광선과도 같으며, 여호와께서 당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엘리의 아들들은 거룩한 율법을 깨뜨렸다; 날고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여호와보다 자기들이 먼저 취해 갔다. 사실상 협박에 의해 빼앗아 간 것이다(16절). 그들은 회막문을 깨끗이 하는 여자들과 동침하였다(22절). 엘 리가 그 아들들에게 충고를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그 말을 듣지 않는 것을 보고 오늘날에도 주의해야 할 엄중한 경고를 한다(25절).

익명의 여호와의 사자(사람)가 와서 심판을 선언한다. 그 당시에는 편지를 쓰면 그것을 전달할 사람(a messenger)이 필요했다. 때때로 전달자를 통해 구두 편지가 전해지기도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전달자를 보낸 자의 대리인이 되었고 보낸 자와 똑같은 위치에 섰다. 자기를 보낸 자의 권위를 그대로 조장하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대답도 하였다. 편지가 어떤 형식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달자의 말’도 어떤 양식에 따랐다. 구약성경과 고고학에서 이런 예를 많이 접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데서 우리는 여호와의 전달자로서의 선지자의 중요성을 더욱 인정하게 되며, ‘그러므로 여호와의 전달자로서의 선지자의 중요성을 더욱 인정하게 되며, ’그러므로 여호와가 말하노라....백성아 귀를 기울일지어다‘라고 말하는 이유도 알게 된다. 그 메시지(27-36절)는 불신실함 때문에 엘리의 제사장 직분을 빼앗으시겠다는 심판이며, 그것은 또한 신실한 한 제사장을 세우시겠다는 암시이다(35절). 직접적인 암시는 사무엘이 이 역할을 대신할 것이라는 것이 되겠는데, 사무엘은 이미 성전 봉사를 통해 훈련받았기 때문이다. 이 약속은 사무엘만이 아니라 여호와의 집에서 봉사하는 모든 충성된 자들까지 포괄한다. 결국 이 약속대로 사독과 그 가족이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에서 봉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여호와께서 자기 나라에서 봉사하기에 합당한 자를 계속 찾으시며 준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있는 그 사람일 수 있다.

사무엘상 2장 주석


사무엘상 2장 주석 1

사무엘상 2장 주석 2

사무엘상 2장 주석 3

Tuesday, September 9, 2008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사무엘하 11:1 - 11:27> 11장 우리아를 죽임

봄이 되었다.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이 돌아왔으나 왕들은 죽음과 파괴를 몰고 오는 전쟁을 하러 나간다(1절). 왕은 뒤에 남아서 나라의 일을 유지하거나 어떤 다른 위협을 경계하는 일이 때때로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요압이 암몬 자손과의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서둘러 출전하여 랍바를 에워쌌다. 1절은 암몬과의 전쟁을 밧세바의 사건과 연결 짓고 있다.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가 그 군대의 장교라는 사실이 나중에 드러난다.

다윗과 밧세바: 이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 주변 세계에서는 흔히 볼 수 있게 된 것일지는 모르나 성경에서는 놀랄 만한 사건이다. 여호와께 대한 다윗의 헌신을 익히 아는 바다. 성경은 '그림 속의 성자‘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사람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여기서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일은 완전한 사람이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들의 일편 단심치 못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루신다.

다 윗과 밧세바 둘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밧세바가 드러내 놓고 목욕한 것에는 지부에서 보게끔 하려는 ‘의도’가 있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아는 바는 그 두 사람이 자기들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와 그 결과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도 간음했다는 사실이다. 우리아를 그 아이의 아버지인 것처럼 꾸밀 다윗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6-13절). 필시 궁중에서 일어난 추문은 밖으로까지 새어 나갔을 것이고, 우리아도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우리아의 말은 참된 용사의 말로서 다윗의 평소 태도에 어울리는 말이다. 다윗의 생은 그에게 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다윗으로서는 그 사건을 자백하든지 아니면 자기가 해를 끼친 그 사람을 죽이든지 하는 대안밖에 없는 것 같았다. 다윗은 후자의 방법을 택하게 되고, 우리아는 자기를 죽이라는 편지를 들고서 전쟁터로 돌아간다. 어떤 잘못을 숨기려 들다 보면 필연코 죄를 짓고 만다.

우리아는 전쟁에서 죽었다(16, 17절). 요압은, 그의 사자가 왕의 물음에 대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를 물을 때 우리아가 죽은 사실도 함께 보고하면 다윗이 요압의 전술에 대해 아무 말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21절의 격언을 주의하라(참조. 삿9:50-55). 27절 마지막 부분에 관심 하는 것이 좋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대한 생각도 없이, 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도 잊은 채 불신의 행동을 계속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어림없다.

이상하게도 다윗에게서 보는 바와 같이 사람들은 사람의 동기와 행동을 보시는 하나님보다 사람의 의견이나 평을 두려워한다.

Wednesday, August 27, 2008

창세기 13장 / 아브라함과 롯 / 김희보(총신대 신대원 교수)

성경을 읽은 분은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흉년을 만므로 살길을 찾아 애굽으로 내려 갔었다.거기서 그는 하마터면 아내를 빼앗길뻔 하였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로 아내를 도로 찾았고 생명도 건 졌었다.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찾아 시험에 빠진 아브라함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러므로 애굽왕 바로를 통하여 그에게 많은 물질을 주셨다. 창13:1-2에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나올쌔...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했음을 본다. 은금만 아니었다. 많은 종들고 데리고 나왔다. 그때의 아브라함의 생 활이 얼마나 풍부하였는지는 그가 318명의 식객(군인 혹은 종)을 거느리고 있있었던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창14:14참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물질을 주시되 풍성히 주셨다. 아! 그러나 슬프다. 아브라함에게는 또 다른 근심이 닥쳤다. 그것은 물진의 풍부로 오는 근심이었다. 창13:7에 "아브라함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그들의 소유가 많아서....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 도 그 땅에 거하였느니라" 했는데 아브라함과 롯 사이에는 그만 물질의 풍부 때문에 오히려 싸움이 생겼다 일이다. 어진 아브라함에게는 큰 근심이요 슬픔 이 아닐 수 없었다. 아브라함은 그 조카 롯을 얼마나 사랑하였던가.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날 때 자기의 아내와 더불어 오직 롯 만을 데리고 떠났었다. 이 한 가지만 보아서도 그가 롯을 얼마나 사랑했었는지 알 수 있다. 롯도 그 삼촌을 그렇게 따랐고 순종했었다. 사실 롯의 아버지는 일찍 죽었었다. 할아버지 데라 보다도 먼저 죽었다.

(창11:2728). 아브라함은 아버지를 잃은 조카를 아들 같이 여겼을 것은 물론이다. 더구나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에 그 나이는 벌써 75세였다고 했다. (창12:4). 그렇게 늙도록 아들이 없었던 아브라함에게 있어 롯은 말이 조카이지 사실은 아들과 다름이 없었을 것은 분명한 일이 아니가.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롯은 어 디를 가나 기쁨과 괴로움을 같이 했었다.
그 랬건만 이제 싸움이 생겼다. 더구나 이방인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이 같이 있는 (창13:7 하) 그 앞에서 피차에 다툼이 생겼다. 이 얼마나 창피한 비극 인가. 이방 사람들의 앞에 하나님의 택한 가정의 집안 싸움이 벌어졌으니 아브라함의 마음은 얼마나 괴로웠으랴! 사실 [은금]이란 말이 성경에 여러번 나오 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은 그 맨 첫번 째이다.

은금이란 말이 나올 때, 그곳에 싸움이란 말이 따라 나왔다.은금이 있는 곳에 싸움이 따르다니! [육축]이란 말도 창세기 1장에서 그것을 창조하셨다는 말이 한번 나온 후(창1:25) 지금 비로소 나오는 말이다. 물론[풍부]라는 말도 처음 나온다. 은금과 육축이 풍부한 그곳에 화평이 아니라 싸움이라면 물질이란 자 칫하면 얼마나 추악한 것인가!

옛날이나 지름이나 재물이란 그 소유자들을 많은 근심으로 찌르는 것을 볼 수 있다(딤전6:10). 아브라함에게는 이제 그 재물 때문에 새로운 근심이 생겼다. 롯도 아브라함과 같은 재물의 복을 받았다. 그러나 많은 육축을 기르기 위한 풀밭을 놓고 저들의 사환들은 서로 다투게 됐다. 드디어 아브라함은 롯과 같이 살 수 없음을 알았다.
그는 롯과 작별하기 위하여 그를 불렀다. 창13:89에 "아브라함이 롯에게 이르되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라.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것은 아브라함의 말이었다. 이 얼마나 슬픈 선언이었던가. 그러나 이제 그에 대한 롯의 태도를 보라.

창13:10에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을 바라본즉 물이 넉넉하니....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더라" 이것은 롯의 요단 뜰을 바라 볼 때의 흡족한 마마음을 묘사한 말이다. 그는 네가 원하는 어느 곳이든지 자유로 택하라는 그 말에 그 마음은 만족했다. 여기 여호와의 동산 같다는 것은 가장 아름답고 기름진 동산 같다는 말이다. 본래 고대 히브리인들은 가장 훌륭한 것, 가장 큰, 것, 가장 아름다운 것을 말할 때는 흔히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렸다.

호렙산, 시내산 헬몬산 같은 큰 산들을 가리켜 "여호와의 산"이라 했고, 큰 나무는 "여호와의 나무"라고도 했다(시104:16).

롯은 요단 뜰을 바라 볼 때 마음이 흡족했다. 옛날 에덴 동산도 네 줄기의 물 근원이 있었다. 롯이 바라 본 그 땅고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의 동산 같다고 했 다. 그 뿐만 아니라 "애굽 땅과 같다"고도 했다.
이 르써 롯의 마음은 아직도 애굽에 있었음을 본다. 성경에서 보는 대로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돌아온 후 다시는 애굽을 사모한 흔적이 없었으나 롯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마치 옛날 출애굽에 나온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사모한 것과도 같았다 (출16:3). 슬프다. 롯은 그 푸른 풀밭, 기름진 동산, 그러나 그 속에 썩어져 가는 소돔과 고모라가 있었음을 깨닫지 못했었다.
창13:13에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했음을 본다.

그러나 혈육의 인간 롯은 그런 죄악에는 무관심이었다. 그렇게도 관영한 소돔의 죄악을 전혀 생각지도 않았다. 사람이 "물질에 눈이 어두우면 신령한 것은 보지 못하는 법이다. 이로써 롯은 아직도 안목의 정욕을 따라가는 세속적 신자의 그림자 임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 같이 택함을 입고 부름을 받아 구속함을 받은 성도의 그림자임에는 틀림없다. 결코 불신자를 대표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베드로 전서에 보면 롯을 가리켜 이상하게도 의인이라 했다.
그 말은 곧 그도 택함을 받고 구속함을 받은 성도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세상을 더 사랑하는 혈육의 성도였다. 신령한 것에는 눈이 어두운 성도였다.

우리는 각자 자기를 반성하며 생각해 보자. 그는 먼저 푸른 요단을 바라 보았다. 다음은 탐심을 따랐다. 자기를 그처럼 사랑하던 아브라함에 대한 의리도 버렸다. 결국은 소돔에 장막을 치고 아주 주저 앉아 버렸다. 이것은 롯이 택한 길이었다. 오늘날 우리도 그렇다. 세상의 물질을 보고 탐심이 생길 수는 있 다. 그러나 곧 돌아서야 한다. 롯과 같이 거기에 앉아버리지 말아야 한다.

자, 그후 롯은 어떻게 되었던가. 곧 불의 심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먼저 하나님의 징계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먼저 징계하시는 법이다. 롯에기도 먼저 징계가 있었다. 창세기 14:1이하에 보면 당시에 시날왕 아므라벨이 인근의 네 왕들과 연합하여 소돔과 고모라 땅을 쳐왔다.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은 약탈 됐고 사람들은 다 포로로 잡혔다. 롯도 그렇게 되었다. 물론 그의 처자도, 재물도 다 빼앗겼다. 하나님의 무서운 징계 였다.(창14:12).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318명의 자기의 사병을 거느리고 원수들을 쫓아갔다. 생명을 걸고 싸웠다. 자기를 버리고 간 그 롯을 위 하여 드디어 롯도 구원하고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부녀들과 다른 사람들도 도로 찾았다 (창14:14-16). 자, 이 때에 롯은 아주 소돔을 떠났어야 했었는데 무 엇이 그렇게도 연연하여 거기에 다시 주저 앉아 버렸다는 말인가. 그 풀밭이 그렇게도 아까왔고 애굽 땅 같이 기름진 그 땅이 그렇게도 좋아서 차마 버릴 수 없었던 모양이다. 마침내 불심판을 받게 될 때에야 비로소 도망쳐 겨우 구원을 얻게 되었다. 롯의 아내는 롯보다 더 한층 세속적이었다. 그는 불타는 소돔을 떠나는 것을 그처럼 아쉬워 하다가 마침내 아주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다.

남편이 잘 못 믿으면 아내라도 잘 믿었어야 할 텐데 그는 그 남편보다도 더 했으니 무슨 소망이 있었겠는가. 롯은 구원을 얻었으되 겨우 불 가운데서 얻은 구 원이었다. 말세의 성도들도 롯과 같이 구원은 얻되 불 가운데서 겨우 얻는 구원이 있으리라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고전 3:12-15에 보면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격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격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했음을 본다.

말세에 롯과 같은 성도들이 많을 것을 경고하신 말씀이다. 우리는 지나치게 안목의 정욕을 따라서 세상으로만 나가지 말 것이다. 비록 잘못 갔더라도 곧 돌 이킬 것이다. 회개의 기회가 주어질 때에 놓치지 말아야 한다.
롯에게도 회개의 기회는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포로가 되는 징계로서 회개의 기회를 주셨던 것이다. 우리는 물질을 더 사랑하던 자의 결과가 어떠함을 롯에게서 배워야한다.

<창세기 13:1 - 13:18> 13장 세상과 타협할 것인가, 하나님으로 만족할 것인가?

1. 회복의 길. 애굽에서 겪은 일은 아브라함에게 굴욕적인 경험이었다. 벧엘 지역으로 돌아오는 그의 여정(3,4절)은 호렙으로 돌아오는 엘리야의 여정(왕상 19:8-18)처럼 순례의 성격을 띠고 있었을 것이다. 위의 두 사람은 모두 하나님과의 사귐을 다시 회복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타락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길은 요한일서 1:9에 잘 나타나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새로이 회복했다는 것을 다음 두 가지로 나타냈다. 1)하나님의 명예에 대한 관심(7,8절). 아브라함은 만일 ‘골육’인 롯과 자신이 분쟁을 하면 주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욕되게 될 것을 우려했다(비교. 느 5:9). 2)평화에 대한 그의 관심(8,9절). 자기와 롯이 다투면 각자에게 속한 사람들 사이의 반목(7절)이 얼마나 쉽게 싸움과 증오로 비화하겠는가! 하지만 모든 권리는 아브라함에게 있었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약속하신 대상은 롯이 아니라 오직 아브라함이었다. 더구나 족장 사회에서 그의 말은 곧 법이었다. 그는 쉽게 롯에게 떠나라고 명령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평화를 위해서 자기 권리와 재산을 양보했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마태복음 5:9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실 때 깊은 뜻을 가지고 하셨다. 사람은 화평을 도모하는 일을 할 때 가장 하나님을 닮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존중히 여기는 자들을 존중히 여기신다는 약속을 어떻게 이루시는지 눈여겨 보라(삼상 2:30). 하나님은 롯이 떠나자마자 이미 하신 약속들을 재확증해 주셨다(14-17절). 그 약속에는 롯이 막 차지하러 떠난 그 영역도 포함되었다(14절, ‘서쪽’). 비록 아브라함은 욕심이 많은 롯과의 유대 관계를 잃었으나, 관대하신 하나님과의 사귐을 계속 간직할 수 있었다.

2. 멸망의 길. 롯은 자원해서 아브라함을 따라나섰을 것이다(12:4). 그러나 그는 삼촌과는 달리,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 다름없이 부(富)를 부려 쓸 능력이 없었다. 아브라함의 제의를 받는 순간 그의 뇌리에는 저열한 물욕이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그것이 좋은 목초지를 삼촌에게 양보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택하는 그의 이기적인 태도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는 악명 높은 소돔(13절)의 악한 영향을 견뎌 낼 능력이 없었다. 이러한 치명적인 타협은 솔로몬(왕상 11:1-8)과 데마(딤후 4:10)의 경우처럼 그의 몰락을 넉넉히 예고해 주었다. 헤브론(18절)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40km쯤 떨어진 지역이다. 아브라함은 의식적으로 유혹의 장소에서부터 점점 멀리 이동해 간 것일까?

창세기 13장 주석


창세기 13장 주석 1

창세기 13장 주석 2

창세기 13장 주석 3

Wednesday, August 20, 2008

다윗과 아비가일의 만남 - 루벤스


1630년 루벤스는 스페인과 영국에서 그의 외교적 기량을 한껏 발휘한 후, 고향 안트워프로 돌아오자 이 그림을 그렸다. 당시 그의 관심이었던.. 평화에 대한 갈망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사무엘상 25장
그림 오른쪽이 나발을 치기위해 군사를 데리고 출발한 다윗과 그무리 (13절), 왼쪽은 그것을 막기위해 급히 음식을 준비해 다윗을 찾아온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과 그 일행이다 (18절)

그림 한 가운데, 두 남녀가... 다윗과 아비가엘.. 두 사람을 지켜보는 모든 이들의 관심이 그들의 대화에 집중되고 있다.

"내 주여! 나발을 개의치 마시고..여종이 주께 가져온 예물을 받으시고, 주의 여종의 허물을 용서하소서...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시리니...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고 친히 보복하신 일로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게 하소서" 아비가일은 간절히 탄원하고...

"네 지혜를 칭찬하니,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내가 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다윗은 그의 청탁을 받아들인다.

한여인의 지혜가 가져온 평화!그리고 그 지혜를 기억한 다윗은.. 나발이 죽자 아비가일에게 아내가 되어달라고 청한다.

1627년에서 1630년 사이에 외교관으로 스페인과 영국을 오갔던 루벤스, 평화를 위해 애썼던 그의 마음이.. 이 작은 그림에 스며있다. 그리고... 우연이었을까? 다윗이 아비가일을 맞이 하듯이 루벤스도 이 그림을 그린 그해에 두번째 부인 엘레나를 맞아들인다. 첫 부인과 사별한지 4년만에.. 다윗이 지혜의 여인 아비가일을 만난 이 그림은 이렇게 루벤스의 사생활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하고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자기를 보전하느니라. 잠언 (14:3)

<사무엘상 25:1 - 25:44> 25장 아비가일

사무엘이 죽었다. 이 소식은 이스라엘 전체에 삽시간에 퍼졌다.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지파동맹의 시대는 이 사무엘-이스라엘 역사에서 두 시대의 가교 역할을 했다-의 죽음과 함께 종식된다. 하나님께서 극히 소수에게 이와 같은 일을 맡기신다. 사무엘은 과거의 위대한 가치 기준들을 엮어서 새로운 왕국시대를 열 수 있게 해 주었다. 그의 집에 장사하는 것은 이상스럽게 생각할 것이 못 된다. 사람을 자기 집 마루 밑에(도제나 석재에 넣어) 장사하였다는 것이 문헌상이나 고고학적으로 증명이 되었다.

이 장에서 자세히 다루어지는 이야기는 세 사람의 삶과 관련이 있다: 부유한 지주 나발과 그의 아내 아비가일과 유다 남쪽 지역 주민들의 보호자 다윗. 이 장에서 언급하는 갈멜은 지중해를 굽어 보고 있는 갈멜산이 아니다(참조.15:12). 이것은 헤브론과 브엘세바 사이 남쪽 깊숙이 자리잡은 곳이다. 성경은 다윗에게 심한 모욕감을 준 나발의 기질을 적절히 묘사한다(25절).

용모뿐만 아니라 지혜에 있어서도 빼어난 아비가일은 고대 풍습에 따라 자기가 다윗을 만나러 가기 전에 예물을 먼저 보내고 있다. 이 상황이 그가 동굴에서 사울을 만나던 때와 다른 것이 없으나 지금은 복수하려고 마음먹고 있다. 아비가일의 말은 이런 점에 관해 예언적인 성격이 있다. 아비가일은 다윗의 행동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악하고 무모한 짓이라고 지적한다. 하나님께서 손수 잘못을 바로잡으실 것이며 다윗에게 멋진 미래를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다윗은 그의 통찰과 용기에 깜짝 놀랐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녀를 보내어(32절) 자기로 하여금 악을 행치 않게 막으신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다윗의 성품에 대해 더 깊이 통찰하게 된다. 그는 그의 위대성과 하나님께 받은 소명에도 불구하고 결코 완전한 자는 아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우리는 또한 그가 추방당한 자(an outlaw)이면서도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그를 불러서 통치하게 하실 백성들에게는 일반적으로 책임성 있게 행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사건이 우리의 뜻대로 풀려 나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사건을 우리 마음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 장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향하신 사랑과 염려의 또 다른 한 면을 보여 준다. 우리는 모든 일이 합력 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실감케 된다. 이 사실에 비추어 우리의 삶을 조명해 보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셨으며 어리석고 잘못된 일로부터 우리를 지키셨는지 살펴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사무엘상 25장 주석

사무엘상 25장 주석 1

사무엘상 25장 주석 2

사무엘상 25장 주석 3

Tuesday, August 19, 2008

Friday, August 15, 2008

You raise me up



When I am down and, oh my soul, so weary
When troubles come and my heart burdened be
Then, I am still and wait here in the silence
Until you come and sit awhile with me

내 영혼이 힘들고 지칠 때
괴로움이 밀려와 나의 마음을 무겁게 할 때
당신이 내 옆에 와 앉으실 때까지
나는 여기에서 고요히 당신을 기다립니다

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on mountains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I am strong, when I am on your shoulders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I can be

당신이 나를 일으켜 주기에, 나는 산에 우뚝 서 있을 수 있고
당신이 나를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폭풍의 바다도 건널 수 있습니다
당신이 나를 떠받쳐 줄 때 나는 강인해 집니다
당신은 나를 일으켜, 나보다 더 큰 내가 되게 합니다

Tuesday, August 12, 2008

<창세기 39:1 - 39:23> 39장 애굽에서의 요셉

보디발(1절)은 ‘프라(태양신)가 준 자’라는 뜻의 보디베라를 히브리어로 줄여 쓴 이름인 듯하다. 그가 ‘시위대장’으로 맡은 주요 임무는 감옥 체제를 관장하는 일었다. 아마 바로의 호위 책임도 맡았던 것 같다. 이때의 바로는 힉소스 왕조(BC 1720-1570) 초기에 속하는 왕 가운데 하나였을 가능성이 있다. 힉소스 왕조는 애굽 본토인들이 아니라 셈족들로서, 애굽의 다른 셈족들에게 상당한 호의를 베풀었다. 이 사실은 훗날 바로가 야곱의 가족을 후대하는 장면을 대할 때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점이다.

이 장의 표면에는 불행이 깔려 있다. 이미 형들에게 버림을 받고 노예로 팔려 온 요셉은 애굽에 와서도 성공과 재앙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요셉은 모함을 받고(보디발이 사형을 내리지 않은 것은 자기 부인의 고소를 그대로 신뢰할 수 없었음을 암시해 준다) 명예도 땅에 떨어졌다. 요셉이 가는 곳마다 재앙도 따라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장의 핵심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라는 구절에 있다(2-6,21-23절). 요셉은 이 사실을 믿었기 때문에 거짓 고소를 당하고도 잠잠할 수 있었고,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거듭되는 불행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다. 그의 성품은 의심할 여지없이 이런 경험으로 다듬어졌다. 하나님께서 급작스런 불행으로 충격을 당한 그를 실제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만나 주셨던 것이 분명하다. 37장과 비교할 때 요셉의 인격은 많이 변했다. 그는 제한된 임무에 충실함으로써(2,22절) 더 큰 임무도 해낼 수 있음을 입증했다. 그가 생활로 나타낸 증거에는 명백한 소양이 있었다(3,23절). 그러므로 요셉은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하실 때 나타나는 변화를 외부 환경과 관계없이 늘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를 주님과 분리해 놓을 정도로 좁은 역경의 길은 없다. 세상의 참 빛을 가릴 만큼 캄캄한 밤은 없다. 우리의 인격을 풍요롭게 하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사용하실 수 없는 상황은 없다.



‣주(註):1절)‘이스마엘 사람’은 미디안 사람이라는 말과 번갈아 쓰였다(비교. 37:25,28;삿 8:24). 미디안 사람이 그들의 민족으로서의 소속을 가리킨다면, 이스마엘 사람은 유목민이자 떠돌아다니는 상인이라는 그들의 직업을 가리킨다. 6절)애굽 사람들에게는 히브리 사람들처럼 음식에 관해서 엄격한 법칙이 있었다. 14절: ‘히브리’라는 말을 쓴 데에는 천시하는 태도가 담겨 있다.

창세기 39장 주석

창세기 39장 주석 1

창세기 39장 주석 2

창세기 39장 주석 3

Monday, August 11, 2008

리챠드 포스터 (Richard Foster)의 영성훈련

Ⅰ. 개인 훈련 - 내면화 훈련

나와 하나님과의 은밀한 가운데 나누는 교제로서, 하나님과 나만의 시간을 만들고, 하나님앞에 나홀로 서서 하나님을 기다리며, 하나님을 앙망하는 훈련이다.


(1) 공부훈련 (말씀훈련)


말씀을 통하여 우리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며, 우리와 함께 계시며 오늘 우리에게 들려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하며, 우리에게 생명력을 주신다.

* 성경말씀을 훈련하는 접근 방법

① 지식훈련 - 성경에 대한 지식을 많이 습득하여 성경을 바로 알고, 성경의 교훈과 진리를 바로 배워 그 진리와 교훈을 순종하여 살고자 한다.

② 생명훈련 - 말씀훈련을 통하여 예수의 생명을 우리속에 넘치게 하여 우리의 인격을 변화 시키는 것으로, 말씀앞에 “나”를 세우고 말씀이 “나”를 깨우치고 변화시키게 하는 것이다.

* 말씀훈련의 종류 ① 신.구약 통독훈련 ② 성경공부 훈련 ③ 말씀묵상 훈련

④ 성구암송 훈련


(2) 기도훈련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며, “나”를 주님의 말씀에 따라 주께 드리며,나의 문제들을 낱낱이 아뢰며, 형제와 자매들을 위하여 증보의 기도를 드리며 끊임없이 내 자신을 돌이키는 삶을 살아간다.

* 윌리암 바클레이 - 기도의 정의

①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일이다.

② 기도는 상황을 바꾸지 않고 우리를 바꾼다.

③ 기도는 우리를 도와서 어려운 처지에서 피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도와서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하여 이를 정복하게 해 주는 것이다.

* 기도의 능력 - 기도는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이 땅위에 실현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이 땅에 들어오게 하는 통로이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60만을 시내산 앞에서 진멸하기로 작정했으나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뜻을 돌이켜 용서하셨다. (출32장)

- 악독한 도시 니느웨 성을 40일이 지나면 멸망시키기로 정했으나 요나의 전도를 받은 백성들이 금식하며 회개 기도할 때에 뜻을 돌이켜 용서하시고 니느웨 성을 구원하셨다.

* 기도의 차원 : 하나님! 내가 말하겠습니다.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 주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듣겠나이다.


(3) 금식훈련


“나”의 삶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어 “나”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 때에 금식하면서, 하나님이 내 속에 있는 죄의 요소를 씻으시도록 “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훈련이다.

* 금식의 종류 ① 일반금식 - 금식기간동안 아무것도 먹지 아니하고 오직 물만마시는 금식, (예수께서 광야에서 행하신 40일간의 금식)

② 절대금식 -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는 금식, 이 금식기간은 보통 3일간이다. (에4:6)

③ 부분금식 - 뜻을 정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 일정한 음식을 금하면서 기도하는 것. (다니엘의 기도, 단1:8-16, 단10:2-3)

④ 정기적인 금식 - 이스라엘 백성은 1년에 한번씩 속죄일에 금식 (레23:27) 예수당시 바리새인들은 주2회 금식, 초대교회 - 수.금요일 금식.

* 금식의 목적 ① 하나님을 섬기고 그를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다. 육체를 쳐서 복종시키고 교만을 깨뜨리고 하나님앞에서 겸손히 행하기 위함이다.

② 회개와 참회를 위함이다. (스9:3-5, 욘3:8)

③ 죄의 사슬에서 해방받기 위함이다. (사58:6) 술, 담배, 마약, 잘못된 습관과 같은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금식하면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을때 가능하다.

④ 하나님께 구별하여 헌신하는 행위로서 금식이다. (행13:3)

(4) 묵상훈련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면서 그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 말씀이 “나”를 고치도록 “나”를 드리는 훈련이다.

*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을까? (요7:17)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가장 중요한 선행 조건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해야 한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없을 때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지라도 순종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Ⅱ. 관계 훈련 (외면화 훈련)


1. 단순화 훈련 (청빈훈련) : 마 6:19-34


단순화 훈련은 내가 소유한 모든 소유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쓰시기를 원하는 곳에, 그리고 궁핍한 형제, 자매들에게 언제든지 나누어 주는 훈련으로, 그리스도인의 청지기직의 훈련이다.


* 누구를 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 것인가? (마6:24-25)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다. 재물(맘몬)과 하나님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우리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섬길수 있는 진실된 주인은 오직 하나님 한분 뿐이시다.


* 단순화 훈련의 중심점 :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다 (마6:33)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께 두고 그 분이 나에게 무엇을 희망하고 요구하시는가를 조용히 듣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을 향해 우리 삶의 방식을 형성해 가는 것을 뜻한다.


* 단순화의 마음가짐

①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에 눈을 뜨라

②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일이 우리의 일이 아니요 하나님의 사업을 돌보고 있다는 새로운 자각

③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을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는 언제라도 내어줄 수 있다는 자유함.


* 단순화의 삶의 방식

① 탐닉하지 않고 소유에서 해방

② 물질에 집착하지 않고 필요한 이들과 나눔

③ 꾸밈없는 행동과 거짓 없는 말

④ 편견, 억압, 차별에서의 해방

⑤ 위신이나 체면보다 실용적인 생활

⑥ 자연을 사랑

⑦ 목표를 향해 한눈팔지 않고 전진!


2. 고독훈련(침묵훈련) : 전5:1-2


고독훈련은 형제, 자매들의 즐거움과 고난과 부르짖음을 듣기 위하여 “나”의 입을 닫고 귀를 열어 놓은 훈련이다.


* 고독 ꠆ꠏ 홀로 있음(Solitude) - 내적 충만의 상태

ꠌꠏ 외로움.소외(loneliness) - 내적 공허의 상태

- 홀로 있는 삶의 훈련은 의도적으로 고요한 장소에 찾아가서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 홀로있는 삶의 훈련은 우리의 혀를 길들이기 위한 것이다.


* 고독훈련의 방법

① 하루 중에 홀로 있는 시간을 활용 - 아침에 일어나서 모든 일을 시작하기 전에 조용히 단 몇분이라도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짐.

② 의도적으로 한달에 한번, 또는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TV.라디오.친구들 또 복잡한 시간을 떠나서 조용한 곳을 찾아감.

③ 말수가 적고 실속있는 말을 하도록 훈련하라


* 침묵은 언제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세에서 오는 것이다.



3. 순종훈련 (자기 부인의 삶) : 막8:34-38


순 종훈련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순종하는 것, 가족 식구들에게 피차 순종하는 것, 이웃에게 대한 순종, 교회공동체를 향한 순종, 고통당하는 자들을 위한 순종등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명령하는 자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순종하는 자로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이 순종훈련이다.


* 순종의 삶 -->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막8:34)


* 순종의 삶은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만을 절대 신뢰함으로써 가능하다

예) 아브라함 - 믿음의 조상 : 창12장

시몬베드로 - 눅5장


* 예수님의 생애는 섬김과 순종이었다. 자기를 부인하므로써 자유를 맛보고 자기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해방을 받았다. : “주님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히5:8-9)


4. 섬김훈련 (봉사의 훈련) : 마6:1-4


섬 김훈련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종이 되어 그들을 섬기는 봉사훈련으로 “나”의 판단과 결정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이웃과 말씀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들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 봉사하는 “종”됨의 훈련이다.


* 기독교의 상징

십자가 : 순종의 상징, 십자가를 지고 순종의 삶을 살때 영적 능력이 증가한다.

수건 : 봉사의 상징, 발을 씻기는 생활을 통해 영적 권위가 더해진다.


* 섬김의 종류

① 남에게 보이기 위한 섬김, 즉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한 섬김

② 은밀한 중에 행하는 오직 하나님앞에서 오른손이 하는것을 왼손이 모르게 행하는 섬김


* 참된 섬김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① 겸손을 배워야 한다.

② 육체의 욕구를 하나하나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

- 오른손이 하는 것은 왼손이 모르게 하는 훈련을 해야한다.


* 삶의 현장에서 실현되야할 섬김의 유형

① 적은 것에서부터 신실한 습관을 길러야 한다.

② 다른 사람의 명예와 덕을 존중해 주는 섬김이 있다.

③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도 섬김의 삶이다.

④ 다른 사람에게 일반적인 호의를 베푸는 섬김

⑤ 남의 이야기를 듣는 섬김.

⑥ 서로 짐을 나누어 지는 것.

⑦ 말씀을 나누는 섬김


* 참된 섬김의 훈련은 육은 십자가에 못박아 죽고 영이 살아서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때만이 가능하며, 자기만족이 아닌 이웃의 행복을 위하여 섬길 수 있는 바른 자세를 갖게된다.




Ⅲ. 공동체 훈련


공동체 훈련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훈련이다.


1. 고백훈련


- 악행의 고백은 선행의 첫출발이다. (st. Augustinus)

- 고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객관적인 변화가 따르고, 우리 자신 안에 주관적인 변화가 따르며, 우리 마음 깊은 곳을 치유하고 변화시키는 수단이다.

꠆ꠏ 고백은 훈련인가? 은사인가?

ꠌꠏ 고백은 개인과 하나님사이에 사적 문제인가? 공동체의 문제인가? (딤전2:15, 약5:16)


- 성경은 죄의 고백과 용서를 기독교 공동체에서 실행하는 훈련으로 가르친다. - 용서의 권세 (요20:23)

꠆ꠏ 천주교 - 고해성사제도

ꠌꠏ 개신교 - 만인제사장직을 받아들이므로(벧전2:9). 그리스도인 공동체

는 다른 사람의 죄를 고백받고 죄용서를 선포할 수 있다.

고해성사의 장점 ① 활자화되고 규격화된 고백의 형식은 어떤 변명이나

정상참작을 허용하지 않는다.

② 용서하는 말이 예상되며, 절대적으로 주어진다. (요

일1:9)

③ 고행을 통하여 죄를 죄로서 더 깊이 인식할 수 있도

록 돕는다. (렘44:4)


* 훌륭한 고백을 위하여 필요한 것 (성 알폰소스 루구오리)

① 양심의 성찰 - “하나님의 응시”앞에서 영혼이 골수까지 찔림을 받고 바로 잡아야 할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② 슬픔 - 죄지은 것을 혐오하며,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을 깊이 후회하는 감정의 산물이기 전에 의지의 산물이다.

③ 죄를 멀리하겠다는 결단 : 거룩한 삶을 사모하고 죄에서 구조되려는 의지를 달라고, 하나님께 정복되고 통치받기를 갈망해야 한다.

그러므로 고백은 슬픔으로 시작되지만 기쁨으로 끝난다. 죄의 용서에는 잔치가 따른다, 결과는 참으로 변화된 삶이 오기 때문이다.


2. 예배훈련


윌리암 템플 : “예배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양심을 촉구하고, 하나님의 진리로 마음을 풍성케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목적에 뜻을 바치는 것이다”


* 예배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신령한 주권에 대한 인간의 응담이며, 아버지의 마음에서 흐르는 사랑의 제의에 대한 응답이다. (요4:23)


*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다.(마4:10, 출20:3)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 우선 순위는 봉사 보다 찬양, 감사, 경배로 정화되는 예배이다. (막12:30)


* 예배를 위한 준비 - “거룩한 기대”를 가지라(10분 일찍 예배당에 들어가시오, 영광의 왕을 경배하며 마음을 고양시키십시오. 예수그리스도에게 나타난 장엄함, 영화로움, 온유함을 묵상하십시오. 예배에 책임을 맡은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옆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시오)


* 예배의 인도자 - 성령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이 우리 마음에 들려 지게하고 그의 임재를 느끼게 하고 우리를 가르치고 인도하고 꾸짖고 위로하신다.


* 예배로 들어가는 길

① 인간위주의 모든 활동을 멈추라

② 찬양과 감사 (히13:15, 골3:16-17)

- 하나님은 온 마음을 다해 드리는 예배를 바라신다. (롬12:1-2)


* 예배의 결과

만 일 예배가 우리를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예배가 아니다. 예배의 시작이 거룩한 기대라면, 그 끝은 거룩한 순종이다. (사6:8) 진정한 예배는 개인차원, 사회차원, 어디에서나 모든 악마의 세력에 대항하는 어린양의 전쟁에 가담하도록 명령하시며 그 명령에 순종하는 삶이다.



3. 인도훈련


이 훈련은 두가지나 그 이상의 생각, 일들 가운데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고민을 안고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선택하게 도와주는 훈련이다.

꠆ꠏꠏꠏꠏꠈ

ꠐ주의ꠐ 우리 중에 누구나 이러한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은 예언의 능력과

ꠌꠏꠏꠏꠏꠎ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 찾아가서 그의 예언을 듣고 어느 하나를 선택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기독교 역사의 전통과 다른 것이요, 상당한 위험이 내포되어 있다. - 한 개인이 아무리 성령 충만해도 그는 사탄이나 심리적인 음성을 들을 수 있으며 마음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하나님의 뜻과 동일시 할때 한 개인이 우상화 될 수 있다.


* 공동체 안에서의 인도훈련의 필요성

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성령이 거하신다. 그러므로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성령께서 그에게 음성을 들려 주신다.

② 한 사람은 시험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잘못 받는 수가 있으나 여러 사람이 똑같이 시험받지는 않기 때문에 공동훈련이 필수적이다.


* 바른 인도의 증거 (행2장)

① 한마음 ② 확신 ③ 전도에 대한 열심 ④ 담대함

(성경의 표준과 유리되어서는 안된다)


* 인도훈련의 방법

① 하나님의 뜻을 찾으라 (요7:17)

②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라

③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라 - 겸손과 기다림

참된 겸손은 자기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





4. 경축훈련


기독교는 축제의 신앙이다.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을 축하하며, 부활의 기쁨을 축하하며 성경강림을 경축하며,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구원을 베풀고 있다는 사실을 찬양하는것이 기독교의 출발이요 기독교의 핵심이다.

- 경축이 없는 신앙은 생명력을 잃어버린 신앙이다. (느8:10)

- 기독교인은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삶을 위해 부름 받은 자이다.

- 즐거움은 성령의 열매요,(갈5:22) 주님이 오셔서 우리 가운데 행하시고 구원의 열매이다.

그러므로 축제의 삶을 살아야 한다.


* 경축훈련의 유익

① 생활에 즐거움을 더해 준다.

② 긴장감에서 해방 - 생기가 넘치는 삶.

③ 함께 울고 함께 웃는 공감대 형성

④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명약은 웃음

⑤ 자아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넒은 시야를!

⑥ 경축은 불균형을 균형있는 삶으로!

⑦ 축제는 재창조의 원동력이 된다.

⑧ 놀이하는 동안 신분의 장벽을 헐고 평등을!

⑨ 기쁨은 더 큰 기쁨으로 인도한다.

⑩ 축제의 전형 - 희년(레25:10, 겔46:17)

희년의 경축행사를 통해서 모든 부채탕감, 노예해방, 토지탄원의 자유의 평등 이룩.


* 경축훈련의 길 - 순종

① 하나님의 선하심을 감사하며 찬양하는 삶을 습성화해야 한다. (빌4:4-7)

② 여러가지 행사의 때를 축제의 기회로 삼아 하나님은 즐거워하며 경배와 찬양과 감사의 축제를 개발, 실천해야 한다.

Tuesday, July 29, 2008

여호수아 6장 주석

여호수아 6장 주석 1

여호수아 6장 주석 2

여호수아 6장 주석 3

내가 만난 천사.

[감동플래쉬] 내가 만난 천사. - 클릭하시면 새창으로 열립니다^^

하나님의 손톱

[감동플래쉬] 하나님의 손톱. - 클릭하시면 새창으로 열립니다^^

<여호수아 5:13 - 6:27> 여호와, 여호수아, 여리고

여호수아가 본 장면(5:13-15)은 여호와의 백성 가운데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여호와께 대해 경외심과 믿음의 관계가 지속되어야 함을 강조해 준다.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란 물음은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드릴 때 당치 않은 것이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한다는 것이 우리가 취할 합당한 태도이다.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 모세에게 하신 것과 같은 말씀이 여기 나오는데(5:15), 이것은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한다 : ‘나는 여호와로라’와 여호수아의 임무의 중대성.

여리고 성의 함락은 다른 성을 정복할 때와는 다른 양상이다. 그 성은 여호와의 몫으로 돌려졌다. 그래서 18절의 경고가 나온다. 성을 공략하는 모든 일들은 여호와의 힘과 관련되어 있다. 제사장들과 언약궤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일곱이란 숫자가 되풀이되고, 성은 사람의 힘이 전혀 작용하지 않았는데 무너져 내린다. 무장한 자들과 제사장들과 언약궤는 길갈을 떠나 예배 행렬을 지어 성 주위를 행진했다. 행진 대형은 무장한 자가 앞장서고, 그 뒤에 나팔을 든 제사장들이 서고,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고, 그 후위에 무장한 자들이 따랐다. 나팔은 종교적인 회합 때나 전쟁 때 또는 백성들에게 경고하거나 불러모을 때 사용되었던 양각 나팔이다. 나팔을 불고 승리의 함성을 외칠 때 여호와께서 여리고 백성을 무너뜨렸다.

여 리고 정복은 역사적이고 고고학적인 어떤 문제점들을 안고 있으나 이 책의 문맥 안에서는 이 이야기가 분명한 신학적인 해석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함으로 증명되어진 이스라엘의 믿음을 본다. 믿음과 승리 뒤에는 불순종의 유혹이 따른다. 우리의 믿음은 자주 시험을 믿는다. 생활에서 불순종의 유혹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야고보서 1:2-4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성숙은 생활의 시련들을 통해서 생긴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하나님은 라합과 맺은 약속을 지키셨다. 그녀와 그 친족만이 여리고 멸망에서 유일한 생존자들이 되었다. 라합과 그 친족들을 진 밖에 두었는데(6:23), 추측컨대 언약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기에 필요한 정결 예식이 끝날 때까지 그렇게 했던 것 같다. 그 성이 완전히 함락된 후, 여호수아는 누구든지 여리고 성을 다시 재건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엄한 경고를 하였다(6:26; 참조. 왕상 16:34).

하나님과의 우리의 관계 있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경외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느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하나님은 거대한 우주의 창조자이신 동시에 지극히 미세한 원자를 만드신 분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우리를 세심한 배려와 포근한 사랑으로 돌보신다.(시 23편: 사 40:27-30).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사랑을 끊임없이 나타내 보이셨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잃어서는 결코 안 된다.

창세기 족장들의 연대

Monday, July 28, 2008

히브리서 어떻게 볼 것인가?

Ⅰ. 여는 글

히브리서는 신약성경 중 가장 구약적인 책이다. 이는 본서가 구약 본문을 직접 인용한 곳이 37군데나 되고 간접적으로 인용한 말씀도 70여 곳에 이를 정도로 구약성경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1) 또한 성소, 제사제도, 제사장 제도와 같은 구약적인 개념들이 히브리서 전체에 깔려 있다. 히브리서는 “신약의 수수께끼”로 알려져 있으며 다른 신약성경보다 독특한 면을 많이 가지고 있다. 이는 아직까지도 히브리서의 저자, 수신자(처), 기록 연대, 히브리서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7장 3절의 멜기세덱처럼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는’ 서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본 글은 히브리서 이해를 위한 전반적인 배경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본 글은 편의상 세 가지 주제들을 다룰 것이다. 첫째 히브리서의 사상적 배경, 둘째 본서의 정경성 문제, 셋째로 저자(著者)에 대한 논점이다. 끝으로 하나님의 의도 신학에서 히브리서가 차지하는 위상에 대하여 시론적으로 접근해 보고자 한다.

Ⅱ. 히브리서의 중요한 논쟁점들
아직까지 히브리서는 신약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본서는 다른 신약성경과는 달리 저자, 수신처, 기록연대, 신학적 배경 등과 같은 문제들 중에서 어느 것 하나 명확하게 단정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또한 본서의 문체는 논문으로 시작했다가 중간에는 설교로 변하고 마지막에는 서신처럼 끝나는 듯하다. 이러한 이유로 초기에는 히브리서가 정경으로 채택되지 못했다.

특히 히브리서의 나타나는 삶의 정황(Sitz im Leben)과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과는 상당한 시간적 간격(gap)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히브리서는 신약신학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시무언은 이와는 다른 각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시무언은 히브리서의 내용이 방대하고 깊다는 것, 즉 난해하고 어렵다는 것은 인정한다.

2) 쿰란 사상
히브리서의 사상적 배경을 쿰란 사상에서 찾게된 것은 1947년에 쿰란 문서들의 발견 때문이다. 이 견해는 히브리서의 저자나 수신자(受信者)들이 쿰란 종파의 일원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영향을 받았던 자들일 것이라는 주장이다.4) 여기에 대하여 보우만(J. W. Bowman)은 그의 저서 『평신도 성경 주석』(Layman’s Bible Commentary)에서 본 서신의 수신자가 쿰란 종파의 영향을 받은 팔레스타인의 헬레니스트 유대인 기독교사회였다고 주장한다. 또한 브라운(F. M. Braun)도 “모든 신약성경 중에서 히브리서는 쿰란 종파의 근본적 경향에 가장 완전한 해답을 주는 책이다”5)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히브리서의 사상적 배경을 쿰란 사상에서 찾는 이유는 멜기세덱에 대한 독특한 해석에 있다. 히브리서에 나타난 멜기세덱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한 제사장’(히 7:3)의 모습이다. 이는 구약성경(시 110:4; 창 14:8)에 나타난 모습과 랍비문헌과 필로(Philo)의 개념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6) 그러나 히브리서에 나타난 멜기세덱과 11Q. Melchizedek(=Qumran Cave11)의 멜기세덱의 모습은 매우 흡사하다. 즉 둘 다 종말론적인 구원자의 상(像)이며, 하늘에 올려진 분, 죄를 대속(代贖)한 점, 하나님에 반대되는 세력을 극복했다는 점, 새 시대의 약속을 가져오는 자 등으로 똑같이 묘사되어 있다는 것이다.7) 이러한 이유로 히브리서의 사상적 배경을 쿰란 사상에서 찾는다.

3) 헬레니즘(Hellenism)
전술한 바, 히브리서는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세련된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보아도 히브리서의 저자가 헬라 철학에 익숙한 자라는 것을 예측하게 한다. 특히 본서에는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인상을 주는 요소가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물질적이고 현상적인 것은 궁극적인 실체가 아니라 그것들은 다만 하늘의 원형(原形)의 모형(模型)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실체(이데아)와 그림자(현상), 영원과 유한, 땅과 하늘 등의 이러한 단어들이 사용됨으로 본서가 플라톤적인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는 근거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지금까지는 히브리서를 이해함에 있어서 필로에 대한 참고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여겼었다. 이는 히브리서에 필로적인 내용들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알레고리적(풍유적)인 경향, 성경이 침묵하는 부분까지의 의미부여(7:3), 멜기세덱의 모형론, 구약의 해석과 적용 등이 필로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최근에는 히브리서가 용어적인 면에서 필로와 유사하나 사상적인 면에서는 그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강조한다.8)

4) 영지주의 사상
본서가 영지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 케제만(E. Kasemann)은 히브리서가 실제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영지주의적 해석을 촉진시키는 것을 의도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히브리서의 중심적인 사상은 3장과 4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순례하는 백성’이라고 했으며, 이는 영혼 순례 사상의 관점에서 이 순례를 보았다.9)

이와 같이 히브리서에는 유대 사상, 헬라사상, 쿰란 사상, 영지주의와 같은 다양한 사상적 배경들이 혼재(混在)되어 있다. 그의 구약에 대한 폭넓은 이해, 헬라 철학에 대한 정통한 지식, 신약성경 중 가장 세련된 헬라어를 사용할 정도의 어휘력, 그 당시의 주변 학문에 대한 해박한 지식 등은 본서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논쟁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이유로 린다스(Barnabas Lindars)는 “히브리서의 저자는 4복음서의 저자와 같이 바울이 신약성경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10)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현란한 지식을 자랑하고자 본서를 기록한 것이 아니다. 그는 목회자의 심령을 가지고 그의 다양한 사상적 배경들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는 위기에 처한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에게 믿음의 경주를 멈추지 말 것을 격려하고자 함이다(12:1). 또한 여러 가지 환란과 핍박으로 인해 믿음을 포기하려는 이들에게 예수가 바로 ‘천사보다 뛰어난 이름을 기업으로 받으신 분이시고, 죄를 정결케 하시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을 권면하고 있다(2:1). 히브리서의 일관된 신학적 주제는 ‘대제사장 기독론’(high priesthood Christology)이며, 그 기독론의 중심에는 하나님과 죄인된 인류를 화해시키는 영원한 그리스도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를 볼 때, 이러한 다양한 사상들에 치우치지 말고 본서의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유념하고 보면 많은 유익이 있을 것이다.

2. 히브리서의 정경성 문제
히브리서는 다른 신약성경에 비해서 여러 가지 의문점들을 안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저자(Authorship) 문제이다. 본서는 저자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심지어 수신자에 대한 것도 모호하다. 결국 이러한 문제들은 히브리서의 정통성을 의심받게 하는 단서를 제공하게 된다. 따라서 히브리서는 최초의 정경 목록인 무라토리 경전(Muratorian Cannon, A. D. 185)에 수록되지 못했고,11) 구(舊) 라틴어 역본에도 수록되지 않았다.12) 저자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정경성의 문제까지 소급해 올라가게 한다. 카르타고 회의(A. D. 397년)에서 히브리서를 정경으로 채택하기 전까지 동·서방 교회에는 견해 차이가 있었다. 동방교회는 2세기 이후로 히브리서를 바울의 저작으로 인정함으로 본서의 정경성도 인정했다. 특히 어거스틴(Augustin)과 제롬(Jerome)은 바울을 히브리서의 저자라고 일관되게 주장했었다. 본서의 저작권을 바울에게 돌리는 것은 곧 정경성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가이샤라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클레멘트(Clement), 판테에누스(Pantaenus)와 같은 이들도 본서에 대한 정경성을 인정했다.13) 2세기 초에 기록된 페쉬타(Peshitta) 신약성경도 본서를 포함시켰다.14) 하지만 서방교회의 입장은 달랐다. 서방교회의 교부 중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였던 터툴리안(Tertullian)은 히브리서를 사도적인 권위가 있는 책으로 인정했으나15), 정경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그는 본서의 저자를 바울의 동역자였던 바나바(Barnabas)에

게 돌렸다.16) 또한 로마의 클레멘트는 바울의 서신들을 알고 있었으나, 그가 A. D. 96년경에 고린도에 쓴 편지에는 바울이 히브리서의 저자라는 것을 명시하지는 않았다.17) 그러나 서방교회는 동방교회의 압력으로 히브리서의 정경성을 4세기 경에 이르러서야 인정하게 된다. 결국 히브리서는 히포 회의(393년), 제3차 칼타고 회의(393년), 제6차 칼타고 회의(419년)에 정경으로 포함된다. 전술한 바와 같이, 본서는 초대 교회 당시에 저작권 문제로 정경성을 의심받았다. 비단 히브리서만이 정경성을 의심받았던 것은 아니다. 제 4복음서로 알려진 요한복음도 초대 교회시대에는 정경성에 대한 의심을 받았었다. 이는 요한복음이 다른 공관복음서들과는 달리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보다는 예수에 대한 신학적 진술을 더 많이 할애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 당시 가장 위협적인 이단이었던 영지주의(Gnosticism)자들이 가장 애용한 것이 바로 요한복음이었다. 주후 170년에 신약성서에 대한 주석 중에서 가장 최초의 것으로 알려진 발렌티안파 영지주의자였던 헤라클레온(Heracleon)이 쓴 요한복음 주석과 프톨레미(Ptolemy)의 요한복음 서론에 대한 주해가 그것이었다.18) 이러한 이유로 그 당시의 베드로 공동체, 마가 공동체, 마태 공동체 등과 같은 사도 공동체에서는 이 요한복음을 정경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요한복음의 사도적 권위와 정경성을 부인하지 않으며 히브리서도 요한복음과 마찬가지로 사도적 권위와 정경성은 의심받지 않는다. 오히려 요한복음과 히브리서에 나타난 기독론은 다른 신약성경에서 언급한 저급 기독론 보다 더욱 발달된 고등 기독론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복음적인 것이다. 더구나 요한복음과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의도의 삼중구조가 잘 드러나 있다.19) 그러므로 히브리서를 대하는 독자들은 히브리서를 ‘구속사’(Heilsgeschichte)라는 신학적 틀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 신학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귀박멸 신학’과 성경 전체를 통해서 나타나는 ‘후사론’(Heir Theory)이라는 아카데믹한 안경을 가지고 본다면 신학과 신앙의 새로운 영적 지평이 열리게 될 것이다.

3. 히브리서의 저작권(Authorship) 문제
히브리서는 저자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지 않다. 또한 수신자들도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히브리서의 저작권에 대한 문제는 지금도 중요한 논쟁점이 되고 있다. 히브리서의 저자로 언급되는 사람으로는 로마의 클레멘트, 누가, 실비누스, 전도자 빌립, 브리스길라 등이 있으나 본고에서는 논란이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바울, 아볼로, 바나바 등 세 명의 인물들에 대하여만 살펴보고자 한다.

1) 바 울(Paul)
히브리서가 바울의 저자라는 것은 고전적인 견해이다. 킹제임스 역(KJV)에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서신”(The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Hebrews)이라고 명확하게 명기하고 있기도 하다. 이 가설을 처음으로 언급한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이다. 비단 클레멘트만 주장한 것이 아니라 동방교회의 교부들은 대체로 이 가설을 지지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전승은 히브리서를 바울의 저작으로 간주한다. 또한 동방교회도 서신의 끝부분을 근거로 하여 바울을 본 서의 저자로 규정한다. 3세기 이후 헬라 교회와 수리아 교회는 아무 의심없이 바울 서신으로 인정하고 데살로니가후서와 디모데전서 사이에 히브리서를 배치했다.20) 오리겐은 문학양식적인 측면에서 비록 바울의 저작과는 다르다는 측면에서 의심하였으나,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라는 명언을 남김으로 바울의 저작이라는 견해에 대하여 굳이 맞서려고 하지는 않았다.21) 이와 같은 이유로 본서의 저자를 바울에게 돌리고 있다.

2) 아볼로(Apollos)
최근에 신약신학자들은 본서의 저자를 아볼로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로는 맨슨(T. W. Manson), 하워드(W. F. Howard), 스픽(C. Spicq), 로버트슨(A. T. Robertson), 헌터(A. M. Hunter) 등이 있다. 히브리서의 저자로 아볼로를 처음 언급한 사람은 루터이다. 이 가설이 지지를 받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히브리서 기자는 유대인이며 바울의 동역자 중 한 사람이다. 또한 그는 디모데와 친분이 있는 사람임을 추측할 수 있다(히 13:23). 이는 히브리서 기자가 자주 유대인 청중들에게 일인칭 복수 대명사를 사용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히브리서의 기자는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에 익숙한 자였으며 신약성경에서 가장 세련된 헬라어를 쓸 정도로 교육받은 자였다.22) 특히 ‘지각’(아이스데테리온),‘창조자’(데미우르고스), ‘의지’(델레시스),‘형벌’(티모리아),‘모형’(휘포데이그마) 등의 단어는 히브리서 기자가 그리스 철학에도 상당히 정통한 자임을 짐작하게 한다. 셋째, 그는 구약에 대한 이해가 상당한 자였다. 그는 11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구약의 믿음의 영웅들을 열거하고 있으며, 구약의 인물들을 저자의 독특한 관점으로 다양하게 재해석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히브리서의 기자는 수사학적(rhetoric)으로 잘 훈련받은 자이다. 히브리서에 사용된 단어, 문법, 그리고 문체들을 통해 그가 얼마나 수사학적으로 뛰어난 자인지를 알 수 있다.23) 이와 같은 조건에 아볼로는 잘 부합된다는 것이다.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다. 또한 언변에 뛰어난 자였고(eloquent) 성경에 능통한 자였다(행 18:24). 또한 그는 바울의 친구였으며, 바울 생애의 마지막이 가까워 올 때가지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고, 유대인들의 사역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인물이었다(딛 3:13). 이러한 이유로 히브리서의 아볼로 저작권은 현대 신약학에서는 상당히 가능성이 있는 가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24)

3) 바나바(Barnabas)
바나바를 본서의 저자로 처음 주장한 이는 터툴리안이다. 바나바가 히브리서를 기록했다고 하는 견해는 후에 제롬에 의해서 언급되었고, 4세기의 저작들이었던 엘비라의 그레고리아 필라스터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코덱스 클레어몬타누스(Codex Claremontanus)라고 불리우는 서방 사본에서 발견된 고대 정경 목록에서도 히브리서는 바나바의 서신이라는 부제로서 기록되어 있다.25) 본서에 대한 바나바의 저작권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지지받고 있다. 첫째, 본서는 구약제사제도에 대하여 상당히 많은 부분을 기술하고 있다. 바나바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으며 레위인이었다(행 4:36). 그러므로 그는 제사제도에 익숙한 자였을 것이다. 둘째, 본서의 저자가“격려의 말”(13:22)이라고 말했듯이 히브리서는 위로의 편지처럼 끝을 맺고 있다. 이는 사도행전 4장 36절에 바나바를“위로의 아들”로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위로의 말”을 쓴 저자를“위로의 아들”인 바나바라고 추측하게 한다. 셋째, 바나바는 복음을 위해서 자기의 부(富)와 돈을 사도들에게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다(행 4:36). 이와 연관성이 있음직한 말씀이 히브리서에 기록되어 있다. 10장 34절에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고 기록함으로 본서의 저자가 바나바라는 개연성을 갖게 한다. 마지막으로 바울과 누가는 바나바를 사도로써 인정하고 있다(고전 9:6; 행 14:14). 게다가 이방인 루스드라에서는 바나바가 바울과 동일한 위치에서 평가받고 있다. 그러므로 바나바는 히브리서의 독자들에게 사도적인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음을 추측하게 한다.26) 이와 같은 이유로 본서의 저자를 바나바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명확하게‘히브리서의 저자는 누구이다’라고 말하기 어렵다. 본서의 바울 저작권은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개연성은 아주 적다고 보여진다. 루터(Luther), 에라스무스(Erasmus), 멜란히톤(Melanchton), 칼빈(Calvin), 베자(Veza)등이 이 서신을 바울의 저작으로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27) 또한 현대에 이르러서는 그 문체나 내적인 특성으로 미루어 볼 때 바울의 저작설이 배제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28) 왜냐하면“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2:3)라는 구절에서 볼 때 본서의 저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직접 들은 자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그는 복음의 제 2세대인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처음에는 예수께서 말씀하셨고, 그 복음을 들은 1세대가 전해준 복음을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서신을 통해서 주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계시를 받은 것으로 말하는 데(갈 1:12; 고전 9:1) 비해서 히브리서 저자는 주님에게 들은 자들이 본서의 저자에게로 한 단계 건너온 것이라고 말한다. 아볼로의 저작설 역시 개연성이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히브리서의 저자를 바울로 본다는 것이다. 만약에 히브리서가 알렉산드리아 출신인 아볼로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라면 바울이 히브리서의 저자라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주장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 가설 또한 확실하지 않다. 바나바는 바나바의 서신(Epistle of Bamabas)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왜 히브리서를 익명으로 남겼는지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또한 히브리서와 바나바 서신을 비교해 보면 동일 저자가 두 서신을 쓸 수 없었으리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나타난다.29) 그러므로 바나바의 저작설은 바울의 저작설이 완전히 배제될 수 없는 것과 같이 완전히 증명될 수 없다.30) 비록 히브리서의 저자에 대한 이견(異見)이 분분하나 그렇다고 하여 본서의 사도적인 권위와 영감성을 부인할 수 없다는 데에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 오리겐(Origen)이 본서의 저자에 대하여 말하기를‘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라고 주장한 것처럼 본서에 대한 저작권 논쟁은 아직 미완의 문제로 남아있다.

Ⅲ. 히브리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도

히브리서는 초대교회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도 저자, 수신자, 기록연대, 사상적 배경에 대한 논란이 명확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다. 또한 지금도 구약에 익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히브리서는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책으로 취급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서는 난해한 만큼 그 영적인 깊이 또한 상당한데 이는 본서에 ‘하나님 의도의 삼중 구조’가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1. 만유의 후사이신 예수 그리스도(1:1-4)

히브리서의 기독론은 요한복음서의 기독론과 유사하다. 이는 둘 다 고등 기독론(a high christology)인 선재(Pre-Existence)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는 것이다(요 1:1-4; 3:13). 1장 1절에서 3절은 히브리서의 서신 전체에 대한 서론이자 결론이다. 저자는 세 개의 관계대명사를 사용하여 아들을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 제시하고 있다.31) 즉 저자는 아들을 하나님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아들을‘인자’, ‘메시아’,‘다윗의 자손’으로 보는 하등 기독론(a low christology)과는 달리‘창세 전부터 본질(휘포스타시스)적으로 하나님과 동등하신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요한복음서의 서두(요 1:1-14)에서 말하고 있는 기독론과 매우 흡사하다. 또한 이는 요한 신학을 기초로 하여 고등 기독론을 지향하는 하나님의 의도 신학의 기독론과 그 궤를 같이한다. 더 나아가 본서의 저자는 창세 전에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클레로노모스)로 미리 정하셨다는 것이다. 이는 성경 전체를 통해서 일관되게 흐르는 중심적인 주제이다(창 15:4; 신 25:6; 룻 4:12; 삼상 2:20; 왕상 15:4; 시 109:13; 마 21:38; 막 12:7; 눅 20:14; 롬 4:13; 8:17; 딛 3:7). 이는 곧 하나님의 의도 신학에서 말하는‘후사론’32)과 일맥상통하다. 이 후사론은 하나님의 의도 신학의 제 1 의적 의(義)로 가장 핵심적인 신학 사상으로 받아 들여진다. 여기에 대하여 윤형식은 “하나님의 의도 신학에서 발생한 후사론은 모든 기독교 조직신학의 뿌리를 흔드는‘태풍의 눈’이다”라고 하여 이 주제의 중요성을 간파한 바 있다.33) 본서의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가“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라고 하여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겸손과 순종을 말하고 있다(5:7-10). 이는 아들이 만유를 상속하실 때, 겸비와 순종으로 하늘 보좌에 오르시는 방법을 자취(自取)하셨다는 하나님의 의도와 관계성이 있음을 시사해 준다.34) 이와 같이 히브리서에는 하나님의 의도 신학의 제 1의적 의가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베뢰아공동체 안에서 히브리서에 나타난 후사론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이 주제에 대한 학문적 논의는 계속 되어야만 할 것이다.

2. 히브리서에 나타난 마귀 진멸과 인간 구원
2장 14-15절은 히브리서의 난해한 구절 중에 하나로 취급된다. 그러나 이 구절은‘마귀 진멸과 인간 구원의 연관성’에 대하여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여기에서 저자는 마귀를 인격체로 취급한다. 저자는‘마귀를 진멸하시고자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과 동일한 모습으로 성육신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키워드(Key word)로 구속사(Heisgeschichte)라는 신학적 전제를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고자 하는 인본주의 신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 본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 하신 것은, 마귀를 멸하시고자 한다는‘하나님 나라 신학’을 지향한다. 하나님의 의도 신학의 제 2의적 의의는‘마귀 진멸’이다. 하나님의 의도 신학은 요한일서 3장 8절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새롭게 조명해 나간다. 예수는 하나님이시며 그의 일을 위하여 임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는 마귀를 저주하고 멸하시려고 몸소 나타나신 것입니다(요일 3:8). 마귀의 일을 멸하시는 주님의 일은 하늘의 일이요, 하늘의 전쟁입니다.35)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마귀 진멸은 그 자체에도 목적이 있겠으나 한편에서는 죽기를 무서워하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마귀 진멸과 인간구원이 동전의 양면 처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히브리서 저자는 말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구속사로 한정(限定)시켜 버리는 인본주의 신학의 한계를 극복하게 한다. 또한 본서의 저자는 마귀의 존재를 관념적이며 철학적인 존재로 치부하는 현대신학과 그의 사역을 등한시하는 현상에 대해 일침을 가한다. 또한 히브리서는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보는 대제사장 기독론(high priesthood Christology)의 독특한 관점을 가진다. 이는 히브리서 기독론의 백미(白眉)와 같다. 오직 히브리서만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본서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굳이 강조하여 기술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해(Reconciliation)를 말하고자 함이다. 여기에 대하여 김기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이며 대제사장이라고 말하는 것은, 주님의 신분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을 헐어 원수된 관계를 무너뜨리고 화해를 시키는 분임을 말하는 것이다”36)라고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에 나타난 대제사장 기독론은 인간구원이라는 신학적 틀에서 논의될 수 있는 개념이다. 이외에도 본서에는‘하나님의 이름론’(1:4),‘천사론’(1:4-14),‘율법과 복음의 관계’, ‘성막론’등 하나님의 의도 신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중요한 개념들이 녹아있다. 이에 대한 연구는 더욱 밀도있게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III. 닫는 글

히브리서는 기독신앙으로 인하여 핍박과 환난을 당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위험에 처한 유대 개종자들에게 그들의 신앙을 포기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격려의 글이다. 저자는 그들이 믿어왔던 유대 신앙에 비해 기독신앙이 얼마나 탁월한지에 대하여 뛰어난 수사학적 기교와 언어로 변증하고 있다. 특히 그는‘좀 더 우월하다’라는 말을 13회나 사용하여 유대교와 기독교를 비교 대조하고 있다. 히브리서는 초대 교회 당시 논쟁이 심했던 기독론에 대하여 명쾌한 답을 제시한다. 특히 본서의 기독론은 요한복음과 더불어 신약성경 중 가장 높고도 가장 발전된 고등 기독론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들은 창조 이전에 선재하신 분이시며, 모든 만유를 지으신 창조주이시요,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 분이시다. 또한 인류의 죄를 정결케 하시며, 천사보다 더 뛰어난 이름을 상속한 만유의 후사이시다. 이는 그가 곧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죄는 없으신 분이시다(4:16). 이는 아들이 ‘참 하나님(vere Deus)이시며 참 사람(vere homo)이시다’ 라는 기독론의 신학적 대전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본서의 저자는 이 아들이 만유의 후사이시며 마귀의 일을 멸하는 분으로 설명, 기독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놓고 있다. 바로 그 아들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분이심을 마지막 장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13:8). 그러므로 다가올 히브리서 연구는 과거에 잘못 인식되었던 오해들을 벗어버리고 좀 더 영적이며 객관화된 학문적 지평을 새롭게 열어나가야 할 것이다.

Monday, July 21, 2008

미루는 버릇 고치기

우리들의 성공적인 삶을 방해하는 나쁜 버릇들이 있다. 그중의 하나가 미루는 버릇이다. 일상사에 꾸물거리는 사람은 게으름이나 두려움으로 인하여 해야 할 일들을 나중으로 미루는 습관을 지닌 사람들이다. 이런 습관이 심하여지면 나중에는 인격적인 흠으로까지 발전하는 경우까지 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들이 지닌 귀한 습관들을 말해 준다. 그런 습관 중에 일처리를 미루지 않고 제때제때 처리하고 마무리 하는 습관이다.

예를 들어 룻기에 등장하는 보아스의 경우이다.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나오미의 미래의 남편 보아스에 대하여 다음같이 말해 준다.

“예야 일이 어떻게 될지 확실하여 잘 때까지 너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거라. 아마 그 사람은 지금쯤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이 일을 마무리 짓는데 오늘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룻기 3장 18절)

보아스는 하여야 할 일을 미루지 않고 신속히 처리함에 명성이 높았다. 일을 처리함에 미루어 꾸물거림을 극복함에 도움이 될 몇 가지 요령이 있다.

첫째는 매일 하여야 할 일들을 목록을 만든다.
둘째는 기도 하는 중에 처리하! 여야 할 일들의 우선순위를 정한다.
셋째는 두 번째 일을 하기 전에 첫 번째 일을 먼저 깔끔히 처리한다.
넷째는 빌립보 4장 13절의 말씀을 기억하며 성령님께 용기를 달라고 기도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 3장 13절)

Sunday, July 20, 2008

Sunday, June 29, 2008

You raise me up





바울 신학의 특징

이신칭의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신약적 이해에 대한 바울의 가장 위대한 공헌은 하나님과 더불어 의에 놓여지는 방법에 관심을 둔 것이다. 바울에 의하면, 칭의란 율법으로 말미암이 아니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발생한다.

바울 신학의 주제이자, 바울이 전한 복음의 중심이며 기독교 자체의 가장 중심적인 내용은, 곧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일컫는다”(이신칭의)라는 말이다. 이는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단순히 믿는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접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이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소위 칭의의 교리가 가장 중요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인을 만드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통하여 사람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된다. 이를 부인하는 자는 진정한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고 오히려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대한 적수(Anti-Christ)가 되며, 인간의 헛된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바울신학의 특징은 사도가 쓴 13개의 서신서 중에서 특히 바울신학 사상의 진수라고 말할 수 있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갈라디아서를 중심으로 확증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진다.



Ⅱ. 바울신학의 특징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주된 목적은, 예루살렘 교회에 소속된 유대주의 순회전도자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찾아와서 바울 자신의 사도직과 복음의 진정성을 훼손시키고, 신도들에게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아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거짓된 복음을 가르침으로써 그들을 혼란시키고 있었다. 이에 격분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과 복음의 신적 기원을 말하고, 또 다시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받게 하리라고 반박하였다.

지난 수세기 동안 많은 성경학자들은 바울의 율법사용에 대한 구분을 함으로써, 예를 들면 율법주의적 율법과 하나님의 뜻의 표현으로서의 율법, 제의(祭儀)적 율법과 도덕적 율법, 혹은 모세의 ‘토라’(Torah; 율법)와 메시야적 토라를 구분함으로써 율법에 대한 바울의 어떤 불일치한 현상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바울이 아무도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고 단언할 때, 그는 전체로서의 율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그리하여 아무도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워질 수 없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주장한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다는 사상은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진정한 복음을 위한 전형이다. 바울은 단순히 종교적 이론이나 사상적 갈등 때문에 칭의론을 전개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이 서느냐 쓰러지느냐 하는 그리스도교 복음의 사활의 문제였다.



1. 바울의 율법관

루터가 말한 바울의 ‘율법과 복음’에 관한 올바른 이해는 성경의 진수를 아는 데 중심 요건이 된다. 바울이 일반적으로 말할 때 율법은 5가지 범주 내에서 사용된다. ① 모세의 율법(갈 3:13) ② 구약성경(롬 3:19) ③ 일반적 의미의 규범 또는 원리(롬 3:27) ④ 필요(롬 7:21, 23, 25) ⑤ 명령(갈 6:2) 등이다.

헬라어 ‘νoμος’(노모스)는 갈디아서에 32번 나오고 로마서에서는 무려 72번이나 나온다. 정관사가 첨부된 ‘o νoμος’(호 노모스)와 관사가 없는 ‘νoμος’(노모스)사이에는 의미상의 차이가 있다고 하여 전자를 모세의 율법으로, 후자를 일반법으로 보는가 하면, 전자를 모세의 율법으로, 후자를 모든 종류의 율법주의로 보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바울의 다른 서신의 경우에서처럼 갈라디아서에서도 의미상의 차이가 없이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볼 때(갈 3:11-12, 23-24), 이러한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바울에 있어서 율법은 언약의 백성에게 주신 생활의 규범일 뿐이지 의인의 규범은 아니었다. 율법은 언약에 대한 그의 일반적 태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옳다고 여김을 받은 사람에 대한 안내자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율법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은총을 밝히신 것과 분리되어, 인간의 의무에 근거하여 제시된 순전한 도덕률이 아니다. 율법은 하나의 표지(標識)된 선, 곧 이 선에 따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백성이나 그들의 생활 자체를 공개하는 선(線)이다.

따라서 바울은 단순히 그리스도 교회를 위해서 모세 율법을 새롭게 윤리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최종적으로 수립된 하나님의 뜻, 곧 시내산 율법과 종말론적으로 일치되며 또 그것을 완성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에로 그들을 부르는 것이다. 교회는 더 이상 모세의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열려진 생의 영적 생활질서 안에 있다(롬 8:2). 이는 그가 결코 율법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음의 법”으로 세운다고 할 때(롬 3:27-31),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더 이상 모세의 율법에서 드러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나타난다는 것을 말한다.

율법에 대한 바울의 논지는 율법이 존재하기 전, 따라서 죄가 성립될 수 있기 전에도 사람들이 계속해서 죽어야 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다는 사실의 증거가 된다. 아담의 죄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죄인으로 인정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께 온전한 의와 온전한 순종을 드렸다. 그래서 아담의 죄 안에 연관 되여 있던 인간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온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악하고 끝없이 계속되는 죄와 죽음의 결박 속에서 해방케 하였다(롬 8:1-2; 히 5:8-9).


2. 칭의

바울의 칭의교리는 ‘하나님의 의’(δίκαίοσvνη θεοv; 디카이오수네 데우)를 전제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의의 개념이 바울의 칭의교리의 핵심을 이룬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 할 것은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은 단순한 법정적인 개념 이상이라는 것이다. 즉 칭의란 죄의 용서를 선언한다는 것보다 더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죄의 용서를 바탕으로 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칭의라는 말은 생명이라는 말과 판단이라는 말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대리인, 그리고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에게 의롭다고 선포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의 총체이다. 우리가 이 단어의 용법을 따라 의롭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의롭다고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


3. 바울 복음의 진수

갈라디아서 1:11-12는 독점적이지는 아닐지라도 사도 바울의 복음의 기원을 말하고 있다. 그 주장인즉 바울의 복음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복음이란 바울이 갈라디아를 첫번 방문했을 때 갈라디아인들에게 전한 복음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의 복음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히려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그의 복음의 기원을 말하려 하는 것이다. “내가 전한 복음”이란 분명히 갈라디아의 거짓 선동자들이 선전하는 복음에 대한 대립개념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만일 바울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원사도들의 복음과 일치되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염두에 두었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의 일치성에 따르는 논리적 함정에 빠질지도 모른다. 적대자들의 주장은 사도 바울의 복음이 원사도들의 복음과 다르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바울의 복음을 적대한 것이다.

이하에서 ‘복음’이라는 말의 어원을 살펴봄으로써 ‘복음’이라는 말 자체가 인간의 사유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겠지만, 바울의 사유 가운데 있는 복음의 내용은 결코 그 자신이 창작해낸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배운 것도 아니고, 다만 그가 다메섹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함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바울은 갈 1:1과 병행되는 갈 11:12에서 바울이 전파한 복음이 왜 참된 그리스도의 복음인지, 왜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는지를 갈 1:11-12와 갈 1:1이 똑같은 병행 구절을 사용하여 자신이 전파한 복음의 신적 기원을 강조한다. 우리가 바울 자신의 서신과 사도행전을 통하여 그릴 수 있는 그림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의 모든 생애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데 헌신하였고 그 복음을 위해 살다가 마침내 그 복음 때문에 순교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복음(유앙겔리온)이라는 말의 사전적(辭典的) 정의(定義)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선포하는 일이다.

신약성서에서 ‘유앙겔리온’이라는 낱말을 제일 처음 사용한 것은 사도 바울이다. 그는 이 말을 다만 기쁜 소식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복음의 내용을 일별하여 보면 먼저, ‘유앙겔리온’이란 복음을 전파한다는 전도활동과 관련해서 사용된다. 여기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자를 일컫는다. 다음으로 바울이 사용한 복음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롬 1:3). 따라서 바울이 사용한 복음의 실체를 파악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관을 살펴봄으로써 복음의 구체적인 의미를 알 수 있다.



Ⅲ. 맺음말


사도 바울의 갈라디아서는 율법문제로 인하여 복음을 놓쳐버린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에 기초하여 성령에 의한 성숙한 신앙을 가르치기 위해서 쓴 서신이다. 당시의 유대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의 12제자가 아닌 바울이 전한 복음은 진정한 복음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들의 주장은 율법과 함께 할례를 받고 그들의 절기를 지켜야 변화된 생활, 즉 온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갈 1:6 )라고 바울은 경탄하였다.

사도의 서신 중에는 무엇이 복음이라고 정의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복음은 그 복음의 출처인 “신적 기원”(갈 2:3-4, 21)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함께 모세의 율법과 아울러 유대교의 전통인 할례를 곁들여야 온전한 복음이 된다고 거짓 교사들의 꾀임에 빠져 들어간 갈라디아 교인들은 혼란에 휘말리게 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사도행전 15장에서 보듯이 사도의 제1차 전도 여행이 끝난 후, 안디옥 교회에서 논쟁하다가 결국 예루살렘 총회에 상정되었다. 거기서 모든 사도들과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는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율법의 강요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행 15:19-20). 바울은 바로 이 결정을 모든 교회에 알려줌으로써 그리스도의 교회를 굳건한 복음 위에 세울 수 있었다.

Friday, June 20, 2008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삶


추천 도서 : 예수와 바울


한국이 나은 세계적인 신학자 김세윤 박사의 논문집입니다. 논문집 성격상 약간은 딱딱한 느낌이 있으나, 여러 주제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느껴지는 탁월한 작품이란 생각이 듭니다. 새순 도서관에서 대여 가능합니다.

Thursday, June 19, 2008

믿음 앞에선 칼뱅 웨슬리 한 형제

믿음 앞에선 칼뱅 웨슬리 한 형제
연중기획-감리회 신앙전통세우기 18
2007년 09월 06일 (목) 12:02:17 기독교타임즈 webmaster@kmctimes.com

이 질문은 양 교파의 창시자인 칼뱅과 웨슬리의 구원론을 짚어봄으로서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흔히 장로교는 이중 예정론을, 감리교는 만인 구원설을 표방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이 두 입장을 대조시켜 보고자 합니다. 칼뱅은 바울-어거스틴-루터의 신학 노선을 이어 받아 이중 예정론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모든 인류를 구원받을 사람들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 이중으로 미리 정해놓으셨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선교 사역을 위해서 제사장, 선지자, 왕, 사도, 목사, 교사, 등 특별한 성직자들을 미리 뽑으신다는 특수 예정론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으나 모든 인류를 나기 전부터 이중으로 예정해 놓으셨다는 일반 예정론은 웨슬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예정론은 흔히 '‘TULIP’으로 요약되는바 칼뱅 신학의 5대 강령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첫째로, ‘Total Corruption’, 즉 ‘전적인 타락’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인간은 단지 악을 선택할 자유만 남았다는 것이지요. 여기에 대해서 웨슬리는 비록 인간이 타락하기는 했지만 모든 인간에게 우주적으로 주어져 있는 선재 은총 때문에 선악간에 판단할 수 있는 양심과 자유의지가 회복되었음을 강조합니다.

둘째로, ‘Unlimited Election’, 즉 ‘무조건적인 선택’입니다. 인간의 구원과 멸망이 인간 편에서의 윤리적 결단이나 선택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하여 무조건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결정론 혹은 숙명론에 대해서 웨슬리는 인간의 구원과 멸망이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 편에서의 신앙과 불신앙에 따라 좌우된다는 조건적 선택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믿지 않으면 멸망당한다고 보았던 것이지요.

셋째로, ‘Limited Atonement’, 즉 ‘제한적 속죄론’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은 영생으로 미리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라는 가르침이지요. 다시 말해 그리스도는 구원으로 예정된 사람들만을 위해서 속죄의 고난과 죽으심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웨슬리는 만인 속죄론 혹은 무제한적 속죄론을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구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으므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속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Irresistible Grace’, 즉 ‘불가항력적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절대적으로 항거할 수 없으므로 그대로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구원과 영생으로 예정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꼼짝없이 받아들여 무조건 구원받을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는데 주목적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알미니안주의자인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라고 역설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총은 자동인형이나 로봇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에 의해 수용될 수도, 거부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Perseverance of Saints’, 선택받은 성도가 무조건적으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보장, 즉 ‘견인적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에 따라 한 번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은 모든 인간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영원토록 구원의 길에서 떨어지지 않고 반드시 구원을 받게 된다는 보장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웨슬리는 비록 구원받은 성도라고 할지라도 지속적인 은혜 생활을 하지 못할 경우 얼마든지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길에 들어섰다고 해서 이제 영적 엘리트가 되었음으로 하등의 성결 노력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정적 신비주의 혹은 반 율법주의적 수동주의를 경계합니다.

칼뱅의 이중 예정론은 많은 신학적인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인류를 구원하길 원하시며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보편성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더욱이 구원과 멸망의 문제에 있어서 인간 편에서의 책임은 물을 수 없고 모든 궁극적인 책임은 하나님께로 집중되고 맙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보기에 별 문제가 없겠지만, 멸망으로 예정된 사람은 자신의 의사나 선택과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에 의해 일방적으로 그 운명이 정해져있기 때문에 아무 책임을 물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다시 전도 혹은 선교 무용론으로까지 연결됩니다. 영생의 길로 예정된 사람들에게 전도는 받든 안 받든 반드시 구원에 이르고야 말도록 운명 지워졌기 때문에 아무 쓸모없는 과잉이 될 터이고, 멸망의 길로 예정된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열심히 복음을 들어도 구원받을 수 없기에 하나의 조소거리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지요.

물론 이런 약점을 피하기 위하여 누가 영생으로 혹은 멸망으로 예정되었는지 미리 알 수 없다는 조건을 달지만, 예정론이라는 말 그 자체가 이미 피할 수 없는 숙명성을 내포하고 있기에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하여 인간 편에서 애쓰는 동기와 수고는 자연 꺾일 수밖에 없습니다. 웨슬리는 예정론의 이와 같은 오류를 환자와 약의 비유를 들어 지적합니다. 환자가 의사가 손을 쓸 겨를도 없이 죽거나 살도록 미리 결정되어 있다면 약을 쓸 필요가 어디에 있느냐는 반문이지요.

결국 성서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웨슬리가 표방한 만인구원설이 칼뱅의 예정론보다 훨씬 더 건전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천재 신학자였던 칼뱅이 예정론의 약점을 몰랐을 리 없으며 다만 목회를 해보니 도무지 구원의 길에 동참하지 않은 고집 사나운 사람들이 있기에, 즉 현실적 목회 경험에서 예정론을 내세웠던 것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이 뚜렷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칼뱅과 웨슬리에게 머리카락 한 올의 차이도 없는 것이 있으니 오직 믿음으로 의로워지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종교개혁의 대원리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칼뱅이나 웨슬리는 한 배를 탔던, 개혁주의의 아들들이었습니다.

성경 주석 : 누가복음 10장

누가복음 10장 주석 1

누가복음 10장 주석 2

누가복음 10장 주석 3

Thursday, June 12, 2008

아침 안개 눈앞 가리듯


믿음과 중생의 인과관계

지난주 믿음과 중생의 인과관계에 대한 열띤 토론 후, 나름대로 묵상의 시간을 갖고 느낀 바를 몇 자 적고자 합니다. 제자반 여러분과 함께 Share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선택된 우리는 중생을 받고, 믿음에 이른다는 주장에 아직도 100%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토론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런 인과관계 안에서는 우리의 자유의지는 무시되고, 우리가 예수를 주로 시인하면, 영생의 선물을 받는다는 성경의 말씀과 약간 차이를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관점의 차이임을 이번 주 성구암송을 하면서 느끼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9절에는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구원의 Process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예비하신 구원에 우리가 믿음으로 응답하면, 중생과 영생의 선물을 받는다는 내용 같습니다. 즉, 구원의 Process는 은혜로 인해 initiate된다는 점에서는 주체가 우리의 믿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분명해 집니다. 그에 대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할 수도 무시할 수도 있으니, 자유의지도 설명이 되는것 같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면, 선물로써, 중생과 영생을 받는다는 자연스러운 인과관계가 설명될 수 있는것 같습니다. 이런 인과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인간의 노력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9절 말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이 자연스럽게 이해 됩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준비 없이는 우리의 어떠한 믿음의 노력도 결실을 맺을 수 없다는 뜻 같습니다. 면벽하여 참선하는 스님들이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예로 풀어보면, 내가 수학문제를 풀때, 형이나 선생님이 자세히 가르쳐 주고, 나를 믿고 그대로 한번 풀어보라고 했을 때, 내가 믿고 답을 얻었다면, 이것은 나의 노력때문이 아니라, 형이나 선생님의 은혜(?, 도움이라고 해야겠죠) 때문이라 할 수 있겠죠. 물론 나의 의지로 받아 들였으니, 기계적으로 나에게 답이 주어진 것도 아니고요.

중생이 선행되지 않고 믿음에 의해서 중생이 된다면, 나의 의지가 너무 강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관점은 하나님의 은혜가 선행되면, 믿음다음에 중생에 와도 나의 의지가 강조되지 않을 수 있다는 반론으로 설명이 될 수 있을것 같습니다. 물론, 저희 관점은 전혀 신학적 바탕이 없는 것으로 여러분의 반론이 있을거라 느껴지고, 또 기다려 집니다. 너무 데카르트식 연역법에 근거한 저의 접근이 무모하게 느껴지는 분이 계실지 모르나, 빠른 시간안에 짧은 인간적 지식과 인간적 언어로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절대적 진리로 부터 논쟁을 시작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해 몇자 적어 봅니다. 여러분의 반론을 기대합니다..

Sunday, May 25, 2008

Here I am to worship

추천 도서 :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기독교의 기본진리를 쓴 존 스토트 목사님의 또 하나의 역작입니다. 새순 도서관에 배치되어 있으니 많이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새 자료실 목록


옆 제자반 게시판에 3가지 새로운 자료를 올렸습니다. 많이 활용하시길 바랍니다.

Thursday, May 8, 2008

추천 도서


옆의 제자반 게시판을 클릭하시면, 여러 권의 추천도서를 다운 받으실 수 있습니다.

Wednesday, May 7, 2008

Saturday, May 3, 2008

Consider Christ

1. Consider Christ, the source of our salvation
That he should take the penalty for me
Though he was pure, a lamb without a blemish;
He took my sins and nailed them to the tree

Chorus
My Lord and God
You are so rich in mercy
Mere words alone are not sufficient thanks.
So take my life, transform, renew and change me
That I might be a living sacrifice

2. Consider Christ, that he could trust his Father
In the garden of Gethsemane
Though full of dread and fearful of the anguish;
He drank the cup that was reserved for me.

3. Consider Christ, for death he has defeated.
And he arose, appeared for all to see.
And now he sits at God’s right hand in heaven
Where he prepares a resting place for me.




Sunday, April 13, 2008

주석 : 마가복음 4장 35절 - 41절

=====4:35
그 날 저물 때에 - 이렇게 자세한 시간적 묘사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없다. 여기서는 앞에서 비유를 통한 가르침이 끝난 시간과 공백을 두지 않고 있다. 즉 '그날 저녁때'라고 명시하여 예수께서 천국 비유를 가르치신 그날 많은 양의 활동을 하신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배에 오르시매'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이 비유를 베푸신 날과 전혀 다른 사건으로 다룬다(마 8:23). 누가복음 역시 '하루는'이라는(눅 8:22) 단어를 사용하여 막연한 어떤 날로 언급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1절에서 묘사된 바닷가 풍경을 그대로 그려주는 듯한 배경 설명을 하고 있다. 이는 매사를 예민하고 세밀하게 취급하고자 하는 마가의 특징적인 문장 기법에 의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계속 갈릴리 바다 곁에서 선교 활동을 하셨는데 그것은 36절의 '배에 계신 그대로'라는 표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여기서 '그 날'은 분명바닷가에서 많은 비유들을 가르치신 날이다.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 이 제안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한 것이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바쁜 일과로 인해 피곤하셨기 때문에 모인 무리들을 피하여 잠시나마 휴식을취하고자 이런 제안을 하셨을 것이다. 한편 '저편'은 배를 타고 가야할 목적지를 가리키는 말로서 바다 건너 맞은편에 있는 언덕을 의미한다. 5:1의 사건과 연결시킨다면이곳은 '거라사인의 지방'일 것이다.

=====4:36
저희가 무리를 떠나 - 여기서 배를 타고 떠나는 일행이 제자들과 예수뿐임을 암시하고 있다.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 1절에서 시작했던 비유를 통한 가르침이 끝난 직후 곧바로 일어난 일임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배에 계신 그대로'란 '떠난 준비를 전혀 하지 않는 채로'(Bengel), '해변에 내려가지 않고'(W. W. Wessel)라는 뜻으로, 예수께서는 무리들을 가르치실 때에 올라 앉으셨던 바로 그 배를 타고 지체없이 건너편으로 가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물론 어부 출신 제자들의 즉각적인 순종과 실행이 뒤따랐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생동감과 현장감 넘치는 마가의 문장 표현법에 의해 눈에 선명히 다가온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이런 상황 묘사가 없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 이는 마가만의 특종 기사이다. 여기서 '다른 배'란 예수와 제자들이 탄배 이외에 다른 사람들이 탄 배를 말하는 데 이 배가 어디로 갔는지, 또 왜 함께 떠났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전체 상황으로 미루어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즉 예수의 가르침에 매료된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기 위해 그날 저물 때에(35절) 같이 출발했을 것이며 또한 예수일행이 만났던 풍랑을 함께 경험했을 것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추측이 가능한 것은 10절에서 묘사된 것처럼 제자들외에 예수를 따라다닌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로 예수께 대한 관심은 낮이나 밤(35절), 그리고 육지에서나 바다에서나를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4: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기네타이 라일랖스 메갈레 마네무) - 회오리처럼 밀어닥치는 바람을 최대한 확대 표현한 말로서 현장감과 긴박감을 더하는 마가의 문장 기법이다. 갈릴리 바다는 대체로 고요하고 음산한 기후를 이루고 있는데, 때때로 무서운 풍랑이 일어난다. 즉 지중해수면보다 약 2oom아래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헤르몬 산에서 요단 계곡 쪽으로 이상기류가 흐를 때 그 기류가 깊은 웅덩이와 같은 갈릴리 바다로 급하게 내려와 회오리같은 바람을 일으키며 이 때 물이 요동하여 무서운 풍랑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 장면은 마가의 독특한 표현기법에 걸맞게 현재 시제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매우 긴박하고 급격한 상황 변화를 묘사해 주고 있다.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 여기서 '부딪혀'(* , 에페발렌)는 미완료 시제로 '물결'(* , 퀴마타, '큰 파도')이 배를 계속해서 때려 정신없는 상태가 진행되고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같은 위험 상황은 극에 달하여 물이 '배에 가득하게'되는 절명의 순간에 이르게 하였다. 이에 대해 마태는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마 8:24), 누가는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 지라"(눅8:23)고 기술하여 한결같이 일촉 즉발()의 침몰 상황을 보고하고 있다. 한편침몰 직전의 위기에 있는 배를 비유적으로 해석하면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첫째는 집단적인 의미에서 교회를 생각할 수 있다. 마가복음이 기록되던 당시에(약A.D. 70) 교회가 말할 수 없는 어려움에 처해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비유적해석은 적절하다고 본다. 둘째는 개인의 삶과 신앙의 위기로 해석할 수 있다.

=====4:38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 이 표현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보다 더 섬세한 표현으로 37절에서 묘사된 급격한 상황 변동과 극한 대조를 보여주고 있다. 즉 예수께서 '고물'(* ,프륌나, '배 뒤편')에서 베개까지 베고 주무신다는 묘사는 풍랑으로 인해 배가 침몰 직전에 있는 상황과는 극명한 차이를 이룬다. 한편 혹자(Lange)에 따르면 '당시 배들안에는 신분이 높은 손님이 오를 경우를 대비하여 고물에 작은 의자가 마련되어 있으며 그 곳에서 양탄자나 베개가 놓여져 있었을 것이다'고했다. 어쨌든 이 '베개'(* , 프로스케파라이온)라는 단어앞에 정관사(* , 토)가 쓰여진 것으로 보아 그 배에는 단 한개의 베개만이 있었음이 분명하며 예수께서는 이 베개에 머리를 두고 잠들었을 것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풍랑과 전혀 상관이 없는 평온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실로 예수께서 잠이 든 이유는 물론 밤에 수면을 하는 일상의 습관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낮 동안 내내 무리들을 가르치신 연고로 인해 육체적으로 상당히 피곤하셨기 때문에 깊이 잠드셨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께서도 역시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니신 참인간이심을 입증해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께서 잠드신 본 장면은 침몰 직전에 있는 배 안팎의 혼란상과 대비하여 절대적인 안정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물론 이같은 안정성은 우주 만물의 대주재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근본으로 하고 계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롬 8:39). 한편 앞절(37절)에서 침몰하는 배를 교회나 개인의 삶과 신앙의 위기로 상징한다면 예수의 평온한 모습은 교회와 개인의 위기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자로서의 모습이라 본다. 다시 말해 마가복음 기자는 이와 같은 광경을 소개하면서 교회와 개인의 이같은 일시적 혼란은 예수에게로 돌아감으로써 영원한 평안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요 14:1).
제자들이 깨우며 - 여기서 '깨우며'에 해당하는 원어 '에게이루신'(*)은 현재 시제를 취하여 매우 다급한 모습을 더욱 생동감 있게 전하고 있다. 마태의 현장성() 짙은 기술 특징이 돋보인다.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 제자들이 원망섞인 어투로 예수를 불러 깨운다. 이러한 제자들의 다급한 외침은 진정 그들이 예수가 누구이신지 아직 완전히 파악치 못한 상태에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향해서 원망섞인 볼멘 소리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무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여기서 제자들이 예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다(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주여'라고 부름). 이같은 마가의 표현은 예수와 제자들의 관계를 구주와 죄인과의 관계가 아닌 단순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묘사함으로써 그들이무례하게 예수를 대한 사실에 간접적으로 일침을 가하고 있다고 보겠다. 실로 우리가 예수를 향하여 어떤 호칭으로, 어떤 외침을 부르짖는가에 따라 우리 신앙의 수준이 간접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4:39
바람을 꾸짖으시며...이르시되 - 여기서는 37, 38절에서 묘사되었던 대혼란과 대조되는 아주 평온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즉 바람이 그치고 물결이 잔잔해진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바람을 꾸짖고 바다를 타일렀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특이한 사실은'꾸짖으시며 '(* , 에페티메센)와 '그치고'(* , 에코파센)등이 부정 과거시제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즉각적이고 단 일회적인 사실을 암시하고 표현이다. 즉 예수께서는 권위에 찬 음성으로 한 번 꾸짖으셨고 이에 견주어 더 이상의 반복이 필요 없을 정도로 풍랑이 잔잔하여진 상태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 문자적으로 '침묵하라'(조용하라), '말하지 말라'(재갈을 물어라)는 뜻이다. 특별히 '잠잠하라'(* , 시오파)는 바람을 향한 현재 명령형으로 '(지금 당장) 그 부는 것을 그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며, '고요하라'(* , 페피모소)는 풍랑이는 바다를 향한 완료 명령형으로 '(더이상의 활동을 중지하고) 그냥 그 상태로 조용히 있으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자연 현상을 인격적 대상으로 삼고 꾸짖고 타이르는 것은 자연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 문자적으로 '크나큰 잔잔이 형성되다'는 뜻으로 마치 언제 풍랑이 있었느냐는 듯이 완전한 평화의 상태가 이뤄졌음을 시사한다. 실로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권위와 능력을 한껏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하나님이 자연을 지배하시고 곤궁에서 구원하신다는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사74:13, 14;107:28, 29 등). 지금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본체()로서 바로 그 하나님의 능력을 수행하고 계신 것이다.

=====4:40
어찌하여...무서워 하느냐...어찌 믿음이 없느냐 - 공동체든 개인이든 위기에 처하면 누구나 당황하고 무서워하게 마련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불신앙적 언행(38절)에 대하여 꾸짖고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이 마태복음에서는 풍랑을 잔잔하게 하기 전에 나온다(마 8:26). 즉 먼저 제자들을 꾸짖고 바람을 꾸짖는다. 아마도 마태는 '풍랑'을 무서워하는 제자들을 꾸짖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던 듯하다. 그러나 마가는 제자들의 '믿음'이 결여된 것에 대한 꾸짖음에 더 관심을 집중하고 있기에 이같은 차이가 생겨났을 것이다. 한편 '어찌 믿음이 없느냐'는 본문이 권위 있는 사본들(시내,
베자, 바티칸)에는 '아직까지'(* , 우포)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고 이에 근거해 공동번역에서는 '아직도...'라고 번역되어 있다. 오히려 이것이 올바른 번역이라 할수 있다. 따라서 두 가지 의미로 이 꾸짖음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풍랑이 일어났을 때의 지나간 일에 대한 꾸지람일 수 있다. 즉 위기에 처했을 때 예수에 대하여 원망어린 말투로 구원을 요청한 사실에 대한 책망일 수 있다. 둘째는예수께서 바다를 잔잔하게한 기적을 보여준 후 '아직도 두려운가?'하고 반문하는 어투와 '아직도 믿음이 없는가?'하고 반문하는 형태의 말로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기적을 보았으니 믿음을 굳게 가지라는 의미로 예수의 꾸지람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의미가 모두 타당하다. 그런데 여기서 '믿음'이란 예수의 인격 안에 현존하며 활동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믿는 믿음을 말한다. 예수께는 제자들의 몰이해와 믿음의 결여에 대해 여러 번책망하셨는데,여기 기록된것이 최초의사건이다(7:18;8:17,18,21,33; 9:19).

=====4:41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 문자적으로 '크나큰 두려움으로 두려워한다'는 뜻으로 히브리인들의 강조적 표현에 해당한다. 여기서 두려워하였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제자들이 예수께 대하여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것에 대한 놀라움곧 일종의 종교적 경외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실로 '두려워한다'는 것은 예수의 능력을 하나님의 능력과 일치시키는 말이다. 즉 하나님을 대하듯이 예수를 대하는 제자들의 심적 변화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의 구체적 표현이 다음에 나오는 반문하는 형식의 문구이다. 즉 '저가 누구시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가?'하는 질문을 함으로써 이 글을 읽고 듣는 사람들에게 암시적 해답을 요구하고 있다(시89:9;107:25-30). 그 대답은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그렇게 하신다'일 것이다.
따라서 이 물음은 예수의 신성()을 논한 것으로 예수께 대한 본질적이고도 존재론 적인 물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실로 마가는 이와 같은 기적 사건을 소개하면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사실을 알리려고 했을 것이다. 한편 박해와 순교의 현장에 놓여 있던 로마교회 신자들에게 이 마가복음의 메시지는 과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 가히 상상할 만하다. 이 사건은 시련과 박해의 풍랑 속에서도하나님의 아들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믿음과 평안을 갖게 해주었을 것이다(사 63:9;벧전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