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une 19, 2008

믿음 앞에선 칼뱅 웨슬리 한 형제

믿음 앞에선 칼뱅 웨슬리 한 형제
연중기획-감리회 신앙전통세우기 18
2007년 09월 06일 (목) 12:02:17 기독교타임즈 webmaster@kmctimes.com

이 질문은 양 교파의 창시자인 칼뱅과 웨슬리의 구원론을 짚어봄으로서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흔히 장로교는 이중 예정론을, 감리교는 만인 구원설을 표방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이 두 입장을 대조시켜 보고자 합니다. 칼뱅은 바울-어거스틴-루터의 신학 노선을 이어 받아 이중 예정론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모든 인류를 구원받을 사람들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 이중으로 미리 정해놓으셨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선교 사역을 위해서 제사장, 선지자, 왕, 사도, 목사, 교사, 등 특별한 성직자들을 미리 뽑으신다는 특수 예정론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으나 모든 인류를 나기 전부터 이중으로 예정해 놓으셨다는 일반 예정론은 웨슬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예정론은 흔히 '‘TULIP’으로 요약되는바 칼뱅 신학의 5대 강령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첫째로, ‘Total Corruption’, 즉 ‘전적인 타락’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인간은 단지 악을 선택할 자유만 남았다는 것이지요. 여기에 대해서 웨슬리는 비록 인간이 타락하기는 했지만 모든 인간에게 우주적으로 주어져 있는 선재 은총 때문에 선악간에 판단할 수 있는 양심과 자유의지가 회복되었음을 강조합니다.

둘째로, ‘Unlimited Election’, 즉 ‘무조건적인 선택’입니다. 인간의 구원과 멸망이 인간 편에서의 윤리적 결단이나 선택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하여 무조건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결정론 혹은 숙명론에 대해서 웨슬리는 인간의 구원과 멸망이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 편에서의 신앙과 불신앙에 따라 좌우된다는 조건적 선택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믿지 않으면 멸망당한다고 보았던 것이지요.

셋째로, ‘Limited Atonement’, 즉 ‘제한적 속죄론’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은 영생으로 미리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라는 가르침이지요. 다시 말해 그리스도는 구원으로 예정된 사람들만을 위해서 속죄의 고난과 죽으심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웨슬리는 만인 속죄론 혹은 무제한적 속죄론을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구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으므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속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Irresistible Grace’, 즉 ‘불가항력적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절대적으로 항거할 수 없으므로 그대로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구원과 영생으로 예정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꼼짝없이 받아들여 무조건 구원받을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는데 주목적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알미니안주의자인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라고 역설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총은 자동인형이나 로봇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에 의해 수용될 수도, 거부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Perseverance of Saints’, 선택받은 성도가 무조건적으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보장, 즉 ‘견인적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에 따라 한 번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은 모든 인간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영원토록 구원의 길에서 떨어지지 않고 반드시 구원을 받게 된다는 보장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웨슬리는 비록 구원받은 성도라고 할지라도 지속적인 은혜 생활을 하지 못할 경우 얼마든지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길에 들어섰다고 해서 이제 영적 엘리트가 되었음으로 하등의 성결 노력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정적 신비주의 혹은 반 율법주의적 수동주의를 경계합니다.

칼뱅의 이중 예정론은 많은 신학적인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인류를 구원하길 원하시며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보편성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더욱이 구원과 멸망의 문제에 있어서 인간 편에서의 책임은 물을 수 없고 모든 궁극적인 책임은 하나님께로 집중되고 맙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보기에 별 문제가 없겠지만, 멸망으로 예정된 사람은 자신의 의사나 선택과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에 의해 일방적으로 그 운명이 정해져있기 때문에 아무 책임을 물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다시 전도 혹은 선교 무용론으로까지 연결됩니다. 영생의 길로 예정된 사람들에게 전도는 받든 안 받든 반드시 구원에 이르고야 말도록 운명 지워졌기 때문에 아무 쓸모없는 과잉이 될 터이고, 멸망의 길로 예정된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열심히 복음을 들어도 구원받을 수 없기에 하나의 조소거리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지요.

물론 이런 약점을 피하기 위하여 누가 영생으로 혹은 멸망으로 예정되었는지 미리 알 수 없다는 조건을 달지만, 예정론이라는 말 그 자체가 이미 피할 수 없는 숙명성을 내포하고 있기에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하여 인간 편에서 애쓰는 동기와 수고는 자연 꺾일 수밖에 없습니다. 웨슬리는 예정론의 이와 같은 오류를 환자와 약의 비유를 들어 지적합니다. 환자가 의사가 손을 쓸 겨를도 없이 죽거나 살도록 미리 결정되어 있다면 약을 쓸 필요가 어디에 있느냐는 반문이지요.

결국 성서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웨슬리가 표방한 만인구원설이 칼뱅의 예정론보다 훨씬 더 건전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천재 신학자였던 칼뱅이 예정론의 약점을 몰랐을 리 없으며 다만 목회를 해보니 도무지 구원의 길에 동참하지 않은 고집 사나운 사람들이 있기에, 즉 현실적 목회 경험에서 예정론을 내세웠던 것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이 뚜렷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칼뱅과 웨슬리에게 머리카락 한 올의 차이도 없는 것이 있으니 오직 믿음으로 의로워지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종교개혁의 대원리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칼뱅이나 웨슬리는 한 배를 탔던, 개혁주의의 아들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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