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5
그 날 저물 때에 - 이렇게 자세한 시간적 묘사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없다. 여기서는 앞에서 비유를 통한 가르침이 끝난 시간과 공백을 두지 않고 있다. 즉 '그날 저녁때'라고 명시하여 예수께서 천국 비유를 가르치신 그날 많은 양의 활동을 하신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배에 오르시매'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이 비유를 베푸신 날과 전혀 다른 사건으로 다룬다(마 8:23). 누가복음 역시 '하루는'이라는(눅 8:22) 단어를 사용하여 막연한 어떤 날로 언급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1절에서 묘사된 바닷가 풍경을 그대로 그려주는 듯한 배경 설명을 하고 있다. 이는 매사를 예민하고 세밀하게 취급하고자 하는 마가의 특징적인 문장 기법에 의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계속 갈릴리 바다 곁에서 선교 활동을 하셨는데 그것은 36절의 '배에 계신 그대로'라는 표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여기서 '그 날'은 분명바닷가에서 많은 비유들을 가르치신 날이다.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 이 제안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한 것이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바쁜 일과로 인해 피곤하셨기 때문에 모인 무리들을 피하여 잠시나마 휴식을취하고자 이런 제안을 하셨을 것이다. 한편 '저편'은 배를 타고 가야할 목적지를 가리키는 말로서 바다 건너 맞은편에 있는 언덕을 의미한다. 5:1의 사건과 연결시킨다면이곳은 '거라사인의 지방'일 것이다.
=====4:36
저희가 무리를 떠나 - 여기서 배를 타고 떠나는 일행이 제자들과 예수뿐임을 암시하고 있다.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 1절에서 시작했던 비유를 통한 가르침이 끝난 직후 곧바로 일어난 일임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배에 계신 그대로'란 '떠난 준비를 전혀 하지 않는 채로'(Bengel), '해변에 내려가지 않고'(W. W. Wessel)라는 뜻으로, 예수께서는 무리들을 가르치실 때에 올라 앉으셨던 바로 그 배를 타고 지체없이 건너편으로 가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물론 어부 출신 제자들의 즉각적인 순종과 실행이 뒤따랐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생동감과 현장감 넘치는 마가의 문장 표현법에 의해 눈에 선명히 다가온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이런 상황 묘사가 없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 이는 마가만의 특종 기사이다. 여기서 '다른 배'란 예수와 제자들이 탄배 이외에 다른 사람들이 탄 배를 말하는 데 이 배가 어디로 갔는지, 또 왜 함께 떠났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전체 상황으로 미루어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즉 예수의 가르침에 매료된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기 위해 그날 저물 때에(35절) 같이 출발했을 것이며 또한 예수일행이 만났던 풍랑을 함께 경험했을 것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추측이 가능한 것은 10절에서 묘사된 것처럼 제자들외에 예수를 따라다닌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로 예수께 대한 관심은 낮이나 밤(35절), 그리고 육지에서나 바다에서나를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4: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기네타이 라일랖스 메갈레 마네무) - 회오리처럼 밀어닥치는 바람을 최대한 확대 표현한 말로서 현장감과 긴박감을 더하는 마가의 문장 기법이다. 갈릴리 바다는 대체로 고요하고 음산한 기후를 이루고 있는데, 때때로 무서운 풍랑이 일어난다. 즉 지중해수면보다 약 2oom아래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헤르몬 산에서 요단 계곡 쪽으로 이상기류가 흐를 때 그 기류가 깊은 웅덩이와 같은 갈릴리 바다로 급하게 내려와 회오리같은 바람을 일으키며 이 때 물이 요동하여 무서운 풍랑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 장면은 마가의 독특한 표현기법에 걸맞게 현재 시제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매우 긴박하고 급격한 상황 변화를 묘사해 주고 있다.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 여기서 '부딪혀'(* , 에페발렌)는 미완료 시제로 '물결'(* , 퀴마타, '큰 파도')이 배를 계속해서 때려 정신없는 상태가 진행되고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같은 위험 상황은 극에 달하여 물이 '배에 가득하게'되는 절명의 순간에 이르게 하였다. 이에 대해 마태는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마 8:24), 누가는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 지라"(눅8:23)고 기술하여 한결같이 일촉 즉발()의 침몰 상황을 보고하고 있다. 한편침몰 직전의 위기에 있는 배를 비유적으로 해석하면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첫째는 집단적인 의미에서 교회를 생각할 수 있다. 마가복음이 기록되던 당시에(약A.D. 70) 교회가 말할 수 없는 어려움에 처해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비유적해석은 적절하다고 본다. 둘째는 개인의 삶과 신앙의 위기로 해석할 수 있다.
=====4:38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 이 표현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보다 더 섬세한 표현으로 37절에서 묘사된 급격한 상황 변동과 극한 대조를 보여주고 있다. 즉 예수께서 '고물'(* ,프륌나, '배 뒤편')에서 베개까지 베고 주무신다는 묘사는 풍랑으로 인해 배가 침몰 직전에 있는 상황과는 극명한 차이를 이룬다. 한편 혹자(Lange)에 따르면 '당시 배들안에는 신분이 높은 손님이 오를 경우를 대비하여 고물에 작은 의자가 마련되어 있으며 그 곳에서 양탄자나 베개가 놓여져 있었을 것이다'고했다. 어쨌든 이 '베개'(* , 프로스케파라이온)라는 단어앞에 정관사(* , 토)가 쓰여진 것으로 보아 그 배에는 단 한개의 베개만이 있었음이 분명하며 예수께서는 이 베개에 머리를 두고 잠들었을 것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풍랑과 전혀 상관이 없는 평온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실로 예수께서 잠이 든 이유는 물론 밤에 수면을 하는 일상의 습관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낮 동안 내내 무리들을 가르치신 연고로 인해 육체적으로 상당히 피곤하셨기 때문에 깊이 잠드셨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께서도 역시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니신 참인간이심을 입증해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께서 잠드신 본 장면은 침몰 직전에 있는 배 안팎의 혼란상과 대비하여 절대적인 안정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물론 이같은 안정성은 우주 만물의 대주재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근본으로 하고 계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롬 8:39). 한편 앞절(37절)에서 침몰하는 배를 교회나 개인의 삶과 신앙의 위기로 상징한다면 예수의 평온한 모습은 교회와 개인의 위기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자로서의 모습이라 본다. 다시 말해 마가복음 기자는 이와 같은 광경을 소개하면서 교회와 개인의 이같은 일시적 혼란은 예수에게로 돌아감으로써 영원한 평안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요 14:1).
제자들이 깨우며 - 여기서 '깨우며'에 해당하는 원어 '에게이루신'(*)은 현재 시제를 취하여 매우 다급한 모습을 더욱 생동감 있게 전하고 있다. 마태의 현장성() 짙은 기술 특징이 돋보인다.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 제자들이 원망섞인 어투로 예수를 불러 깨운다. 이러한 제자들의 다급한 외침은 진정 그들이 예수가 누구이신지 아직 완전히 파악치 못한 상태에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향해서 원망섞인 볼멘 소리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무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여기서 제자들이 예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다(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주여'라고 부름). 이같은 마가의 표현은 예수와 제자들의 관계를 구주와 죄인과의 관계가 아닌 단순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묘사함으로써 그들이무례하게 예수를 대한 사실에 간접적으로 일침을 가하고 있다고 보겠다. 실로 우리가 예수를 향하여 어떤 호칭으로, 어떤 외침을 부르짖는가에 따라 우리 신앙의 수준이 간접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4:39
바람을 꾸짖으시며...이르시되 - 여기서는 37, 38절에서 묘사되었던 대혼란과 대조되는 아주 평온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즉 바람이 그치고 물결이 잔잔해진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바람을 꾸짖고 바다를 타일렀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특이한 사실은'꾸짖으시며 '(* , 에페티메센)와 '그치고'(* , 에코파센)등이 부정 과거시제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즉각적이고 단 일회적인 사실을 암시하고 표현이다. 즉 예수께서는 권위에 찬 음성으로 한 번 꾸짖으셨고 이에 견주어 더 이상의 반복이 필요 없을 정도로 풍랑이 잔잔하여진 상태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 문자적으로 '침묵하라'(조용하라), '말하지 말라'(재갈을 물어라)는 뜻이다. 특별히 '잠잠하라'(* , 시오파)는 바람을 향한 현재 명령형으로 '(지금 당장) 그 부는 것을 그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며, '고요하라'(* , 페피모소)는 풍랑이는 바다를 향한 완료 명령형으로 '(더이상의 활동을 중지하고) 그냥 그 상태로 조용히 있으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자연 현상을 인격적 대상으로 삼고 꾸짖고 타이르는 것은 자연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 문자적으로 '크나큰 잔잔이 형성되다'는 뜻으로 마치 언제 풍랑이 있었느냐는 듯이 완전한 평화의 상태가 이뤄졌음을 시사한다. 실로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권위와 능력을 한껏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하나님이 자연을 지배하시고 곤궁에서 구원하신다는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사74:13, 14;107:28, 29 등). 지금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본체()로서 바로 그 하나님의 능력을 수행하고 계신 것이다.
=====4:40
어찌하여...무서워 하느냐...어찌 믿음이 없느냐 - 공동체든 개인이든 위기에 처하면 누구나 당황하고 무서워하게 마련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불신앙적 언행(38절)에 대하여 꾸짖고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이 마태복음에서는 풍랑을 잔잔하게 하기 전에 나온다(마 8:26). 즉 먼저 제자들을 꾸짖고 바람을 꾸짖는다. 아마도 마태는 '풍랑'을 무서워하는 제자들을 꾸짖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던 듯하다. 그러나 마가는 제자들의 '믿음'이 결여된 것에 대한 꾸짖음에 더 관심을 집중하고 있기에 이같은 차이가 생겨났을 것이다. 한편 '어찌 믿음이 없느냐'는 본문이 권위 있는 사본들(시내,
베자, 바티칸)에는 '아직까지'(* , 우포)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고 이에 근거해 공동번역에서는 '아직도...'라고 번역되어 있다. 오히려 이것이 올바른 번역이라 할수 있다. 따라서 두 가지 의미로 이 꾸짖음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풍랑이 일어났을 때의 지나간 일에 대한 꾸지람일 수 있다. 즉 위기에 처했을 때 예수에 대하여 원망어린 말투로 구원을 요청한 사실에 대한 책망일 수 있다. 둘째는예수께서 바다를 잔잔하게한 기적을 보여준 후 '아직도 두려운가?'하고 반문하는 어투와 '아직도 믿음이 없는가?'하고 반문하는 형태의 말로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기적을 보았으니 믿음을 굳게 가지라는 의미로 예수의 꾸지람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의미가 모두 타당하다. 그런데 여기서 '믿음'이란 예수의 인격 안에 현존하며 활동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믿는 믿음을 말한다. 예수께는 제자들의 몰이해와 믿음의 결여에 대해 여러 번책망하셨는데,여기 기록된것이 최초의사건이다(7:18;8:17,18,21,33; 9:19).
=====4:41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 문자적으로 '크나큰 두려움으로 두려워한다'는 뜻으로 히브리인들의 강조적 표현에 해당한다. 여기서 두려워하였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제자들이 예수께 대하여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것에 대한 놀라움곧 일종의 종교적 경외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실로 '두려워한다'는 것은 예수의 능력을 하나님의 능력과 일치시키는 말이다. 즉 하나님을 대하듯이 예수를 대하는 제자들의 심적 변화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의 구체적 표현이 다음에 나오는 반문하는 형식의 문구이다. 즉 '저가 누구시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가?'하는 질문을 함으로써 이 글을 읽고 듣는 사람들에게 암시적 해답을 요구하고 있다(시89:9;107:25-30). 그 대답은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그렇게 하신다'일 것이다.
따라서 이 물음은 예수의 신성()을 논한 것으로 예수께 대한 본질적이고도 존재론 적인 물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실로 마가는 이와 같은 기적 사건을 소개하면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사실을 알리려고 했을 것이다. 한편 박해와 순교의 현장에 놓여 있던 로마교회 신자들에게 이 마가복음의 메시지는 과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 가히 상상할 만하다. 이 사건은 시련과 박해의 풍랑 속에서도하나님의 아들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믿음과 평안을 갖게 해주었을 것이다(사 63:9;벧전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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