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여는 글
히브리서는 신약성경 중 가장 구약적인 책이다. 이는 본서가 구약 본문을 직접 인용한 곳이 37군데나 되고 간접적으로 인용한 말씀도 70여 곳에 이를 정도로 구약성경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1) 또한 성소, 제사제도, 제사장 제도와 같은 구약적인 개념들이 히브리서 전체에 깔려 있다. 히브리서는 “신약의 수수께끼”로 알려져 있으며 다른 신약성경보다 독특한 면을 많이 가지고 있다. 이는 아직까지도 히브리서의 저자, 수신자(처), 기록 연대, 히브리서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7장 3절의 멜기세덱처럼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는’ 서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본 글은 히브리서 이해를 위한 전반적인 배경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본 글은 편의상 세 가지 주제들을 다룰 것이다. 첫째 히브리서의 사상적 배경, 둘째 본서의 정경성 문제, 셋째로 저자(著者)에 대한 논점이다. 끝으로 하나님의 의도 신학에서 히브리서가 차지하는 위상에 대하여 시론적으로 접근해 보고자 한다.
Ⅱ. 히브리서의 중요한 논쟁점들
아직까지 히브리서는 신약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본서는 다른 신약성경과는 달리 저자, 수신처, 기록연대, 신학적 배경 등과 같은 문제들 중에서 어느 것 하나 명확하게 단정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또한 본서의 문체는 논문으로 시작했다가 중간에는 설교로 변하고 마지막에는 서신처럼 끝나는 듯하다. 이러한 이유로 초기에는 히브리서가 정경으로 채택되지 못했다.
특히 히브리서의 나타나는 삶의 정황(Sitz im Leben)과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과는 상당한 시간적 간격(gap)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히브리서는 신약신학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시무언은 이와는 다른 각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시무언은 히브리서의 내용이 방대하고 깊다는 것, 즉 난해하고 어렵다는 것은 인정한다.
2) 쿰란 사상
히브리서의 사상적 배경을 쿰란 사상에서 찾게된 것은 1947년에 쿰란 문서들의 발견 때문이다. 이 견해는 히브리서의 저자나 수신자(受信者)들이 쿰란 종파의 일원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영향을 받았던 자들일 것이라는 주장이다.4) 여기에 대하여 보우만(J. W. Bowman)은 그의 저서 『평신도 성경 주석』(Layman’s Bible Commentary)에서 본 서신의 수신자가 쿰란 종파의 영향을 받은 팔레스타인의 헬레니스트 유대인 기독교사회였다고 주장한다. 또한 브라운(F. M. Braun)도 “모든 신약성경 중에서 히브리서는 쿰란 종파의 근본적 경향에 가장 완전한 해답을 주는 책이다”5)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히브리서의 사상적 배경을 쿰란 사상에서 찾는 이유는 멜기세덱에 대한 독특한 해석에 있다. 히브리서에 나타난 멜기세덱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한 제사장’(히 7:3)의 모습이다. 이는 구약성경(시 110:4; 창 14:8)에 나타난 모습과 랍비문헌과 필로(Philo)의 개념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6) 그러나 히브리서에 나타난 멜기세덱과 11Q. Melchizedek(=Qumran Cave11)의 멜기세덱의 모습은 매우 흡사하다. 즉 둘 다 종말론적인 구원자의 상(像)이며, 하늘에 올려진 분, 죄를 대속(代贖)한 점, 하나님에 반대되는 세력을 극복했다는 점, 새 시대의 약속을 가져오는 자 등으로 똑같이 묘사되어 있다는 것이다.7) 이러한 이유로 히브리서의 사상적 배경을 쿰란 사상에서 찾는다.
3) 헬레니즘(Hellenism)
전술한 바, 히브리서는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세련된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보아도 히브리서의 저자가 헬라 철학에 익숙한 자라는 것을 예측하게 한다. 특히 본서에는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인상을 주는 요소가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물질적이고 현상적인 것은 궁극적인 실체가 아니라 그것들은 다만 하늘의 원형(原形)의 모형(模型)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실체(이데아)와 그림자(현상), 영원과 유한, 땅과 하늘 등의 이러한 단어들이 사용됨으로 본서가 플라톤적인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는 근거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지금까지는 히브리서를 이해함에 있어서 필로에 대한 참고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여겼었다. 이는 히브리서에 필로적인 내용들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알레고리적(풍유적)인 경향, 성경이 침묵하는 부분까지의 의미부여(7:3), 멜기세덱의 모형론, 구약의 해석과 적용 등이 필로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최근에는 히브리서가 용어적인 면에서 필로와 유사하나 사상적인 면에서는 그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강조한다.8)
4) 영지주의 사상
본서가 영지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 케제만(E. Kasemann)은 히브리서가 실제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영지주의적 해석을 촉진시키는 것을 의도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히브리서의 중심적인 사상은 3장과 4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순례하는 백성’이라고 했으며, 이는 영혼 순례 사상의 관점에서 이 순례를 보았다.9)
이와 같이 히브리서에는 유대 사상, 헬라사상, 쿰란 사상, 영지주의와 같은 다양한 사상적 배경들이 혼재(混在)되어 있다. 그의 구약에 대한 폭넓은 이해, 헬라 철학에 대한 정통한 지식, 신약성경 중 가장 세련된 헬라어를 사용할 정도의 어휘력, 그 당시의 주변 학문에 대한 해박한 지식 등은 본서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논쟁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이유로 린다스(Barnabas Lindars)는 “히브리서의 저자는 4복음서의 저자와 같이 바울이 신약성경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10)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현란한 지식을 자랑하고자 본서를 기록한 것이 아니다. 그는 목회자의 심령을 가지고 그의 다양한 사상적 배경들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는 위기에 처한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에게 믿음의 경주를 멈추지 말 것을 격려하고자 함이다(12:1). 또한 여러 가지 환란과 핍박으로 인해 믿음을 포기하려는 이들에게 예수가 바로 ‘천사보다 뛰어난 이름을 기업으로 받으신 분이시고, 죄를 정결케 하시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을 권면하고 있다(2:1). 히브리서의 일관된 신학적 주제는 ‘대제사장 기독론’(high priesthood Christology)이며, 그 기독론의 중심에는 하나님과 죄인된 인류를 화해시키는 영원한 그리스도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를 볼 때, 이러한 다양한 사상들에 치우치지 말고 본서의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유념하고 보면 많은 유익이 있을 것이다.
2. 히브리서의 정경성 문제
히브리서는 다른 신약성경에 비해서 여러 가지 의문점들을 안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저자(Authorship) 문제이다. 본서는 저자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심지어 수신자에 대한 것도 모호하다. 결국 이러한 문제들은 히브리서의 정통성을 의심받게 하는 단서를 제공하게 된다. 따라서 히브리서는 최초의 정경 목록인 무라토리 경전(Muratorian Cannon, A. D. 185)에 수록되지 못했고,11) 구(舊) 라틴어 역본에도 수록되지 않았다.12) 저자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정경성의 문제까지 소급해 올라가게 한다. 카르타고 회의(A. D. 397년)에서 히브리서를 정경으로 채택하기 전까지 동·서방 교회에는 견해 차이가 있었다. 동방교회는 2세기 이후로 히브리서를 바울의 저작으로 인정함으로 본서의 정경성도 인정했다. 특히 어거스틴(Augustin)과 제롬(Jerome)은 바울을 히브리서의 저자라고 일관되게 주장했었다. 본서의 저작권을 바울에게 돌리는 것은 곧 정경성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가이샤라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클레멘트(Clement), 판테에누스(Pantaenus)와 같은 이들도 본서에 대한 정경성을 인정했다.13) 2세기 초에 기록된 페쉬타(Peshitta) 신약성경도 본서를 포함시켰다.14) 하지만 서방교회의 입장은 달랐다. 서방교회의 교부 중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였던 터툴리안(Tertullian)은 히브리서를 사도적인 권위가 있는 책으로 인정했으나15), 정경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그는 본서의 저자를 바울의 동역자였던 바나바(Barnabas)에
게 돌렸다.16) 또한 로마의 클레멘트는 바울의 서신들을 알고 있었으나, 그가 A. D. 96년경에 고린도에 쓴 편지에는 바울이 히브리서의 저자라는 것을 명시하지는 않았다.17) 그러나 서방교회는 동방교회의 압력으로 히브리서의 정경성을 4세기 경에 이르러서야 인정하게 된다. 결국 히브리서는 히포 회의(393년), 제3차 칼타고 회의(393년), 제6차 칼타고 회의(419년)에 정경으로 포함된다. 전술한 바와 같이, 본서는 초대 교회 당시에 저작권 문제로 정경성을 의심받았다. 비단 히브리서만이 정경성을 의심받았던 것은 아니다. 제 4복음서로 알려진 요한복음도 초대 교회시대에는 정경성에 대한 의심을 받았었다. 이는 요한복음이 다른 공관복음서들과는 달리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보다는 예수에 대한 신학적 진술을 더 많이 할애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 당시 가장 위협적인 이단이었던 영지주의(Gnosticism)자들이 가장 애용한 것이 바로 요한복음이었다. 주후 170년에 신약성서에 대한 주석 중에서 가장 최초의 것으로 알려진 발렌티안파 영지주의자였던 헤라클레온(Heracleon)이 쓴 요한복음 주석과 프톨레미(Ptolemy)의 요한복음 서론에 대한 주해가 그것이었다.18) 이러한 이유로 그 당시의 베드로 공동체, 마가 공동체, 마태 공동체 등과 같은 사도 공동체에서는 이 요한복음을 정경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요한복음의 사도적 권위와 정경성을 부인하지 않으며 히브리서도 요한복음과 마찬가지로 사도적 권위와 정경성은 의심받지 않는다. 오히려 요한복음과 히브리서에 나타난 기독론은 다른 신약성경에서 언급한 저급 기독론 보다 더욱 발달된 고등 기독론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복음적인 것이다. 더구나 요한복음과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의도의 삼중구조가 잘 드러나 있다.19) 그러므로 히브리서를 대하는 독자들은 히브리서를 ‘구속사’(Heilsgeschichte)라는 신학적 틀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 신학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귀박멸 신학’과 성경 전체를 통해서 나타나는 ‘후사론’(Heir Theory)이라는 아카데믹한 안경을 가지고 본다면 신학과 신앙의 새로운 영적 지평이 열리게 될 것이다.
3. 히브리서의 저작권(Authorship) 문제
히브리서는 저자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지 않다. 또한 수신자들도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히브리서의 저작권에 대한 문제는 지금도 중요한 논쟁점이 되고 있다. 히브리서의 저자로 언급되는 사람으로는 로마의 클레멘트, 누가, 실비누스, 전도자 빌립, 브리스길라 등이 있으나 본고에서는 논란이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바울, 아볼로, 바나바 등 세 명의 인물들에 대하여만 살펴보고자 한다.
1) 바 울(Paul)
히브리서가 바울의 저자라는 것은 고전적인 견해이다. 킹제임스 역(KJV)에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서신”(The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Hebrews)이라고 명확하게 명기하고 있기도 하다. 이 가설을 처음으로 언급한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이다. 비단 클레멘트만 주장한 것이 아니라 동방교회의 교부들은 대체로 이 가설을 지지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전승은 히브리서를 바울의 저작으로 간주한다. 또한 동방교회도 서신의 끝부분을 근거로 하여 바울을 본 서의 저자로 규정한다. 3세기 이후 헬라 교회와 수리아 교회는 아무 의심없이 바울 서신으로 인정하고 데살로니가후서와 디모데전서 사이에 히브리서를 배치했다.20) 오리겐은 문학양식적인 측면에서 비록 바울의 저작과는 다르다는 측면에서 의심하였으나,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라는 명언을 남김으로 바울의 저작이라는 견해에 대하여 굳이 맞서려고 하지는 않았다.21) 이와 같은 이유로 본서의 저자를 바울에게 돌리고 있다.
2) 아볼로(Apollos)
최근에 신약신학자들은 본서의 저자를 아볼로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로는 맨슨(T. W. Manson), 하워드(W. F. Howard), 스픽(C. Spicq), 로버트슨(A. T. Robertson), 헌터(A. M. Hunter) 등이 있다. 히브리서의 저자로 아볼로를 처음 언급한 사람은 루터이다. 이 가설이 지지를 받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히브리서 기자는 유대인이며 바울의 동역자 중 한 사람이다. 또한 그는 디모데와 친분이 있는 사람임을 추측할 수 있다(히 13:23). 이는 히브리서 기자가 자주 유대인 청중들에게 일인칭 복수 대명사를 사용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히브리서의 기자는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에 익숙한 자였으며 신약성경에서 가장 세련된 헬라어를 쓸 정도로 교육받은 자였다.22) 특히 ‘지각’(아이스데테리온),‘창조자’(데미우르고스), ‘의지’(델레시스),‘형벌’(티모리아),‘모형’(휘포데이그마) 등의 단어는 히브리서 기자가 그리스 철학에도 상당히 정통한 자임을 짐작하게 한다. 셋째, 그는 구약에 대한 이해가 상당한 자였다. 그는 11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구약의 믿음의 영웅들을 열거하고 있으며, 구약의 인물들을 저자의 독특한 관점으로 다양하게 재해석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히브리서의 기자는 수사학적(rhetoric)으로 잘 훈련받은 자이다. 히브리서에 사용된 단어, 문법, 그리고 문체들을 통해 그가 얼마나 수사학적으로 뛰어난 자인지를 알 수 있다.23) 이와 같은 조건에 아볼로는 잘 부합된다는 것이다.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다. 또한 언변에 뛰어난 자였고(eloquent) 성경에 능통한 자였다(행 18:24). 또한 그는 바울의 친구였으며, 바울 생애의 마지막이 가까워 올 때가지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고, 유대인들의 사역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인물이었다(딛 3:13). 이러한 이유로 히브리서의 아볼로 저작권은 현대 신약학에서는 상당히 가능성이 있는 가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24)
3) 바나바(Barnabas)
바나바를 본서의 저자로 처음 주장한 이는 터툴리안이다. 바나바가 히브리서를 기록했다고 하는 견해는 후에 제롬에 의해서 언급되었고, 4세기의 저작들이었던 엘비라의 그레고리아 필라스터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코덱스 클레어몬타누스(Codex Claremontanus)라고 불리우는 서방 사본에서 발견된 고대 정경 목록에서도 히브리서는 바나바의 서신이라는 부제로서 기록되어 있다.25) 본서에 대한 바나바의 저작권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지지받고 있다. 첫째, 본서는 구약제사제도에 대하여 상당히 많은 부분을 기술하고 있다. 바나바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으며 레위인이었다(행 4:36). 그러므로 그는 제사제도에 익숙한 자였을 것이다. 둘째, 본서의 저자가“격려의 말”(13:22)이라고 말했듯이 히브리서는 위로의 편지처럼 끝을 맺고 있다. 이는 사도행전 4장 36절에 바나바를“위로의 아들”로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위로의 말”을 쓴 저자를“위로의 아들”인 바나바라고 추측하게 한다. 셋째, 바나바는 복음을 위해서 자기의 부(富)와 돈을 사도들에게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다(행 4:36). 이와 연관성이 있음직한 말씀이 히브리서에 기록되어 있다. 10장 34절에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고 기록함으로 본서의 저자가 바나바라는 개연성을 갖게 한다. 마지막으로 바울과 누가는 바나바를 사도로써 인정하고 있다(고전 9:6; 행 14:14). 게다가 이방인 루스드라에서는 바나바가 바울과 동일한 위치에서 평가받고 있다. 그러므로 바나바는 히브리서의 독자들에게 사도적인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음을 추측하게 한다.26) 이와 같은 이유로 본서의 저자를 바나바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명확하게‘히브리서의 저자는 누구이다’라고 말하기 어렵다. 본서의 바울 저작권은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개연성은 아주 적다고 보여진다. 루터(Luther), 에라스무스(Erasmus), 멜란히톤(Melanchton), 칼빈(Calvin), 베자(Veza)등이 이 서신을 바울의 저작으로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27) 또한 현대에 이르러서는 그 문체나 내적인 특성으로 미루어 볼 때 바울의 저작설이 배제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28) 왜냐하면“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2:3)라는 구절에서 볼 때 본서의 저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직접 들은 자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그는 복음의 제 2세대인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처음에는 예수께서 말씀하셨고, 그 복음을 들은 1세대가 전해준 복음을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서신을 통해서 주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계시를 받은 것으로 말하는 데(갈 1:12; 고전 9:1) 비해서 히브리서 저자는 주님에게 들은 자들이 본서의 저자에게로 한 단계 건너온 것이라고 말한다. 아볼로의 저작설 역시 개연성이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히브리서의 저자를 바울로 본다는 것이다. 만약에 히브리서가 알렉산드리아 출신인 아볼로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라면 바울이 히브리서의 저자라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주장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 가설 또한 확실하지 않다. 바나바는 바나바의 서신(Epistle of Bamabas)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왜 히브리서를 익명으로 남겼는지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또한 히브리서와 바나바 서신을 비교해 보면 동일 저자가 두 서신을 쓸 수 없었으리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나타난다.29) 그러므로 바나바의 저작설은 바울의 저작설이 완전히 배제될 수 없는 것과 같이 완전히 증명될 수 없다.30) 비록 히브리서의 저자에 대한 이견(異見)이 분분하나 그렇다고 하여 본서의 사도적인 권위와 영감성을 부인할 수 없다는 데에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 오리겐(Origen)이 본서의 저자에 대하여 말하기를‘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라고 주장한 것처럼 본서에 대한 저작권 논쟁은 아직 미완의 문제로 남아있다.
Ⅲ. 히브리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도
히브리서는 초대교회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도 저자, 수신자, 기록연대, 사상적 배경에 대한 논란이 명확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다. 또한 지금도 구약에 익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히브리서는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책으로 취급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서는 난해한 만큼 그 영적인 깊이 또한 상당한데 이는 본서에 ‘하나님 의도의 삼중 구조’가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1. 만유의 후사이신 예수 그리스도(1:1-4)
히브리서의 기독론은 요한복음서의 기독론과 유사하다. 이는 둘 다 고등 기독론(a high christology)인 선재(Pre-Existence)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는 것이다(요 1:1-4; 3:13). 1장 1절에서 3절은 히브리서의 서신 전체에 대한 서론이자 결론이다. 저자는 세 개의 관계대명사를 사용하여 아들을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 제시하고 있다.31) 즉 저자는 아들을 하나님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아들을‘인자’, ‘메시아’,‘다윗의 자손’으로 보는 하등 기독론(a low christology)과는 달리‘창세 전부터 본질(휘포스타시스)적으로 하나님과 동등하신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요한복음서의 서두(요 1:1-14)에서 말하고 있는 기독론과 매우 흡사하다. 또한 이는 요한 신학을 기초로 하여 고등 기독론을 지향하는 하나님의 의도 신학의 기독론과 그 궤를 같이한다. 더 나아가 본서의 저자는 창세 전에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클레로노모스)로 미리 정하셨다는 것이다. 이는 성경 전체를 통해서 일관되게 흐르는 중심적인 주제이다(창 15:4; 신 25:6; 룻 4:12; 삼상 2:20; 왕상 15:4; 시 109:13; 마 21:38; 막 12:7; 눅 20:14; 롬 4:13; 8:17; 딛 3:7). 이는 곧 하나님의 의도 신학에서 말하는‘후사론’32)과 일맥상통하다. 이 후사론은 하나님의 의도 신학의 제 1 의적 의(義)로 가장 핵심적인 신학 사상으로 받아 들여진다. 여기에 대하여 윤형식은 “하나님의 의도 신학에서 발생한 후사론은 모든 기독교 조직신학의 뿌리를 흔드는‘태풍의 눈’이다”라고 하여 이 주제의 중요성을 간파한 바 있다.33) 본서의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가“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라고 하여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겸손과 순종을 말하고 있다(5:7-10). 이는 아들이 만유를 상속하실 때, 겸비와 순종으로 하늘 보좌에 오르시는 방법을 자취(自取)하셨다는 하나님의 의도와 관계성이 있음을 시사해 준다.34) 이와 같이 히브리서에는 하나님의 의도 신학의 제 1의적 의가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베뢰아공동체 안에서 히브리서에 나타난 후사론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이 주제에 대한 학문적 논의는 계속 되어야만 할 것이다.
2. 히브리서에 나타난 마귀 진멸과 인간 구원
2장 14-15절은 히브리서의 난해한 구절 중에 하나로 취급된다. 그러나 이 구절은‘마귀 진멸과 인간 구원의 연관성’에 대하여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여기에서 저자는 마귀를 인격체로 취급한다. 저자는‘마귀를 진멸하시고자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과 동일한 모습으로 성육신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키워드(Key word)로 구속사(Heisgeschichte)라는 신학적 전제를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고자 하는 인본주의 신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 본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 하신 것은, 마귀를 멸하시고자 한다는‘하나님 나라 신학’을 지향한다. 하나님의 의도 신학의 제 2의적 의의는‘마귀 진멸’이다. 하나님의 의도 신학은 요한일서 3장 8절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새롭게 조명해 나간다. 예수는 하나님이시며 그의 일을 위하여 임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는 마귀를 저주하고 멸하시려고 몸소 나타나신 것입니다(요일 3:8). 마귀의 일을 멸하시는 주님의 일은 하늘의 일이요, 하늘의 전쟁입니다.35)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마귀 진멸은 그 자체에도 목적이 있겠으나 한편에서는 죽기를 무서워하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마귀 진멸과 인간구원이 동전의 양면 처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히브리서 저자는 말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구속사로 한정(限定)시켜 버리는 인본주의 신학의 한계를 극복하게 한다. 또한 본서의 저자는 마귀의 존재를 관념적이며 철학적인 존재로 치부하는 현대신학과 그의 사역을 등한시하는 현상에 대해 일침을 가한다. 또한 히브리서는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보는 대제사장 기독론(high priesthood Christology)의 독특한 관점을 가진다. 이는 히브리서 기독론의 백미(白眉)와 같다. 오직 히브리서만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본서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굳이 강조하여 기술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해(Reconciliation)를 말하고자 함이다. 여기에 대하여 김기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이며 대제사장이라고 말하는 것은, 주님의 신분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을 헐어 원수된 관계를 무너뜨리고 화해를 시키는 분임을 말하는 것이다”36)라고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에 나타난 대제사장 기독론은 인간구원이라는 신학적 틀에서 논의될 수 있는 개념이다. 이외에도 본서에는‘하나님의 이름론’(1:4),‘천사론’(1:4-14),‘율법과 복음의 관계’, ‘성막론’등 하나님의 의도 신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중요한 개념들이 녹아있다. 이에 대한 연구는 더욱 밀도있게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III. 닫는 글
히브리서는 기독신앙으로 인하여 핍박과 환난을 당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위험에 처한 유대 개종자들에게 그들의 신앙을 포기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격려의 글이다. 저자는 그들이 믿어왔던 유대 신앙에 비해 기독신앙이 얼마나 탁월한지에 대하여 뛰어난 수사학적 기교와 언어로 변증하고 있다. 특히 그는‘좀 더 우월하다’라는 말을 13회나 사용하여 유대교와 기독교를 비교 대조하고 있다. 히브리서는 초대 교회 당시 논쟁이 심했던 기독론에 대하여 명쾌한 답을 제시한다. 특히 본서의 기독론은 요한복음과 더불어 신약성경 중 가장 높고도 가장 발전된 고등 기독론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들은 창조 이전에 선재하신 분이시며, 모든 만유를 지으신 창조주이시요,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 분이시다. 또한 인류의 죄를 정결케 하시며, 천사보다 더 뛰어난 이름을 상속한 만유의 후사이시다. 이는 그가 곧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죄는 없으신 분이시다(4:16). 이는 아들이 ‘참 하나님(vere Deus)이시며 참 사람(vere homo)이시다’ 라는 기독론의 신학적 대전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본서의 저자는 이 아들이 만유의 후사이시며 마귀의 일을 멸하는 분으로 설명, 기독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놓고 있다. 바로 그 아들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분이심을 마지막 장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13:8). 그러므로 다가올 히브리서 연구는 과거에 잘못 인식되었던 오해들을 벗어버리고 좀 더 영적이며 객관화된 학문적 지평을 새롭게 열어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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