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October 15, 2008

<요한복음 11:28 - 11:37> 슬픔을 아시는 구주

본문에서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깊은 동정심을 품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분의(그리고 하나님의)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 보게 된다(그것은 또한 우리 모두를 향해 품으신 마음이기도 하다). 이 모습은 신들이 ‘고립되고, 열정도 없고, 동정심도 없는’(바클레이), 한마디로 감정이 없는 줄로 알고 있던 헬라의 독자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계시였다. (a)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사람을 보내 마리아가 집에 가득 모인 호곡하는 사람들에게서 떠나 잠시라도 자기와 함께 있도록 하신다(28절). (b) 예수님은 마리아와 그녀를 따라온 자들이 슬피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셨다. (c) 나사로가 묻힌 곳에 함께 가자는 말씀을 들으실 때도 눈물을 흘리셨다. (d) 무덤 앞에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통분히 여기셨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으나 이 모든 일이 있은 후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셨다. 이로 보건대, 그 기적은 단순히 기계적인 행위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그 분은 진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신 분이다(사53:4;마8:17). 그 권능의 역사 하나 하나마다 그 분에게 어떤 대가를 요구했다(막 5:30).

마르다가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른 데에서(28절), 우리는 그 분이 베다니의 이 가정을 성경에 기록된 것 이외에도 여러 차례 방문하셨음을 다시 한 번 짐작하게 된다. 예수님이 그 여인들에게 랍비가 되어 주신 이 사실은, 그 당시 여자들을 가르치기를 거부했던 랍비들의 태도와는 크게 대조된다. 그러나 이때는 그들을 조용히 가르칠 상황이 아니었다. 그 집은 사람들로 북적대고 호곡소리로 가득했다. (이런 광경은 35절에서 보는 대로 예수께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과 대조된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셨는데(33절), 이것은 전에 없던 강렬한 감정의 표시이다(타스커). ‘그것은 예수께서 사람들의 운명에 깊이 가담하사 친구들의 슬픔을 자기의 슬픔으로 삼으셨음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모리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을 볼 때, 죽음의 권세를 가진 자와의 싸움을 눈앞에 두고 계시던 상황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참조.12:27;13:21). 예수님은 결전을 예비하는 전사(戰士)로서 나사로의 무덤을 향해 가셨다(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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