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문학작품이라도 능가할 이 드라마를 기록하는 데에는 오직 열 일곱 절이 씌었을 뿐이다. 요한의 글은 꼭 필요한 내용만 실으므로써 눈에 띄게 간결하다. 당시의 무덤은 바위를 앞에서 깊이 파내고, 입구는 크고 평평한 돌로 막아 놓은 형태였던 것의 거의 분명하다. 예수님은 무덤 앞에 이르시자 다시 심령에 통분함을 느끼셨지만, 지체하지 않으시고 무덤을 막은 돌을 치우라고 하셨다. 그 순간 전율을 일으킬 정도로 경이로운 정적(靜寂)이 있었으리라고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정적을 깨고 마르다가 합리적인 이의를 제기했다(39절)- 예수님께 대한 그녀의 믿음은 한이 없었으나, 반면에 분명치 못했다. 예수님은 얼마전에 사람을 보내 그녀에게 분명히 하신 말씀(4절)을 상기시키신다. 예수님은 마르다 역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동일한 목적에 생각이 고정되어 있기를 바라셨다. 예수님이 지금 하시려는 일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또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권능을 사람들 앞에 장엄하게 나타내시려는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들에게 보여 깨닫게 하시려는 데에도 그 목적이 있었다. ‘군중들은 그 기적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그 기적의 진정한 의미 곧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모리스).
이 일을 염두에 두고서, 예수님은 눈을 들고서(아마 큰 소리로)항상 아버지와 나누시던 대화의 일부인 것이 거의 틀림없는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은 먼저 아버지께서 기도를 들어 주신 것을 감사하신다(41절)-기록되지는 않았으나, 아마 이 상황에 처음 임하셨을 때 기도를 하신 것 같다. 그러고는 아버지께서 항상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확신을 표하신다. 그 분은 항상 아버지와 함께 고통을 나누시며 대신 일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렇게 주위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기도하신 것은, 자신이 스스로를 위해서 일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요 대리인임을 깨닫게 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요한은 기적을 기록하기에 앞서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하기를 바란다. 그런 뒤, 예수님은 큰소리로 나사로를 부르셨다(43절). 이렇게 함으로써 주위의 모든 사람이 그 소리를 들었고, 나사로가 살아난 원인에 대해서 이론(異論)이 생길 여지가 없었다(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시기 전에는 이렇게 큰 소리를 사용하시지 않으셨다). 그 소리를 듣고 죽은 자가 무덤에서 걸어 나왔다-그의 생명은 사망과 음부의 열쇠(계 1:18)를 쥔 분에 의해서 되돌아온 것이다. 예수님은 오직 그의 대권만을 행사하셨다. 경외심에 사로잡혀 넋을 잃고 바라보던 나사로의 친구들은 주님의 말씀에 정신을 차리고 나사로의 목에서 붕대를 풀어 주었다.
Subscribe to:
Post Comments (Atom)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