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17절)은 나름대로의 충분한 의미를 가지는 기간이었다. 그 당시 민간에는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사람을 몸에 머물다가 떠난다는 신앙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흘째 되는 그 날에는 나사로가 정말로 죽었다는 것이 기정사실이 되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죽은 자의 집을 방문에서 유가족을 위로하는 것을 중요한 의무로 생각했던 까닭에, 나사로의 집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와 있었다(19절). 예수님은 마중나온 마르다에게 진심어린 위로의 말씀을 하셨다. 하지만 그것은 애도의 말씀은 아니었다.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이라는 말로 서운한 빛을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는 존경하는 선생님께 대한 간절한 믿음이 담겨 있었다. 물론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39절). 예수님은 마지막 날 모든 사람이 부활할 것이라는 바리새인들의 신앙을 가지고 있던 마르다에게, 삶을 변화시키는 진리를 가르치신다. 예수님은 그렇게 먼 미래에 대한 막연한 소망이 이제 막을 내렸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부활과 생명이 의미하던 모든 것이 당신 안에 있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단순히 생명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생명이라는 말씀이다. “나는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비록 육체의 죽음을 경험하더라도 곧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육체의 죽음이란 이제 지평선으로 들어가는 문에 불과하다. 그들이 향해 가는 곳은 해지는 곳이 아닌 해 돋는 곳이다.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부터 죽음이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간다’(모리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더욱 강조하시기 위해서 26절과 같은 역설적인 말씀을 하신다. 과연 신자에게 대해서는 육체의 죽음이 그 실체와 최종성을 잃는 것이다.
마르다는 과연 이 엄청난 새로운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을까? 그녀는 매우 강조적인 어조로‘내가 믿나이다’라고 대답한다(27절)-헬라어에서는 동사에 주어의 인칭이 나타나므로 강조할 목적 이외에는 주어를 따로 표기하지 않는다. 또한 ‘믿나이다’라고 했을 때 그 말이 현재시제로 씌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실제로는 완료형으로 씌어서, 그것이 ‘일단 생긴 뒤로는 영원히 남아 있는 믿음임을 보여 준다’(모리스). 마르다는 예수께서 그리스도 곧 메시야임과, 하나님의 아들임(1:34,49;20:31)을 믿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 온 분으로 믿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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