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되었다.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이 돌아왔으나 왕들은 죽음과 파괴를 몰고 오는 전쟁을 하러 나간다(1절). 왕은 뒤에 남아서 나라의 일을 유지하거나 어떤 다른 위협을 경계하는 일이 때때로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요압이 암몬 자손과의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서둘러 출전하여 랍바를 에워쌌다. 1절은 암몬과의 전쟁을 밧세바의 사건과 연결 짓고 있다.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가 그 군대의 장교라는 사실이 나중에 드러난다.
다윗과 밧세바: 이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 주변 세계에서는 흔히 볼 수 있게 된 것일지는 모르나 성경에서는 놀랄 만한 사건이다. 여호와께 대한 다윗의 헌신을 익히 아는 바다. 성경은 '그림 속의 성자‘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사람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여기서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일은 완전한 사람이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들의 일편 단심치 못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루신다.
다 윗과 밧세바 둘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밧세바가 드러내 놓고 목욕한 것에는 지부에서 보게끔 하려는 ‘의도’가 있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아는 바는 그 두 사람이 자기들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와 그 결과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도 간음했다는 사실이다. 우리아를 그 아이의 아버지인 것처럼 꾸밀 다윗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6-13절). 필시 궁중에서 일어난 추문은 밖으로까지 새어 나갔을 것이고, 우리아도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우리아의 말은 참된 용사의 말로서 다윗의 평소 태도에 어울리는 말이다. 다윗의 생은 그에게 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다윗으로서는 그 사건을 자백하든지 아니면 자기가 해를 끼친 그 사람을 죽이든지 하는 대안밖에 없는 것 같았다. 다윗은 후자의 방법을 택하게 되고, 우리아는 자기를 죽이라는 편지를 들고서 전쟁터로 돌아간다. 어떤 잘못을 숨기려 들다 보면 필연코 죄를 짓고 만다.
우리아는 전쟁에서 죽었다(16, 17절). 요압은, 그의 사자가 왕의 물음에 대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를 물을 때 우리아가 죽은 사실도 함께 보고하면 다윗이 요압의 전술에 대해 아무 말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21절의 격언을 주의하라(참조. 삿9:50-55). 27절 마지막 부분에 관심 하는 것이 좋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대한 생각도 없이, 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도 잊은 채 불신의 행동을 계속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어림없다.
이상하게도 다윗에게서 보는 바와 같이 사람들은 사람의 동기와 행동을 보시는 하나님보다 사람의 의견이나 평을 두려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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