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구절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다. 이스라엘이 광야40년 동안 실패헌 것에 반하여, 예수께서는 광야40일 동안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새 이스라엘의 질 대표자임을 제시하고 있는가? 아니면, 마귀의 시험에 떨어져 온 인류에게 파멸을 가져 온 아담과 오히려 승리하신 예수를 대비시키고 있는가? 아니면, 세례를 빈 은 후, 마귀의 훼방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성취하도록 시험받은 육체를 입으신 메시야를 묘사하는가? 심사숙고해 보면 이 세 가지 견해가 다 필요하고, 또 상호 연관됨을 알 수 있다.
예수는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메시야로 왔다. 그의 승리를 통하여 그 나라 는 이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자기들의 임무를 성취해야 할 것이다(예수께서 시험에 이기시면서 사용하신 말씀들이 모두 신명기서라는 것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3; 6:16;6:13. 이것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들이다). 그러나 예수는 온 세상을 위한 메시야이다. 따라서, 그는 모든 사람이 실패한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순종을, 또 모든 인류를 위하여 자신을 죽음에 내어 주는 순종을 실현할 둘째 아담으로 이 땅에 오셨다. 따라서, 예수는 메시야로서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그는 마귀와 결전을 벌일 전투지로 성령에 이끌려 당당히 나아가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먼저 마귀의 통치와 죄의 세력을 격파하는 일을 통하여 을 수 있도록 시험을 받으신 것이다(요 12:31-32을 보라).
Friday, October 31, 2008
Thursday, October 23, 2008
<사무엘하 9:1 - 10:19> 9,10장 므비보셋
왕궁의 일상생활에 관한 자세한 기록으로부터 이제 우리는 때때로 나타나는바 성경상의 목적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듯한 일련의 이야기를 접한다. 그러나 그렇게 보일 뿐이지 실상은 그 이야기는 아주 정선된 것으로 ‘누가 다윗을 이을 것인가?’라는 물음에 집중되어 있다. 소위 ‘계승 설화’는 열왕기상2:12에서 결론이 날 때까지 꾸준히 계속된다. 열왕기상2:12에서는 솔로몬이 다윗의 보좌에 올라 그의 나라를 굳게 세우게 된다. 계승 문제와 함께 다루어지고 있는 또 다른 중요한 주제는 다윗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우리아를 죽인 후 칼이 다윗의 집을 떠나지 않는데, 다윗이 죽은 뒤에조차도 그러하다. 이제 21-24장을 제외하고는 이야기가 이 두 목적을 보여 주는 왕가 생활의 주요 사건들을 따라 전개된다.
9장에서는 요나단에 대한 사랑 때문에 사울가에 쏟는 다윗의 관심이 이야기된다. 그의 이런 행동에서 부수적으로 얻는 바는 사울의 유일한 합법적 계승자들을 예루살렘에 거하게 함으로써 왕국을 다시 찾고자 하는 기회를 전혀 주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얄궂게도 다윗의 왕좌를 잠시 탈취한 자는 다윗 자신의 아들이다. 21장의 이야기는 벌써 일어난 사건이고, 필시 이 사건 때문에 요나단을 위해 그 후손을 서둘러 찾아서 그에게 큰 호의를 베풀게 되었을 것으로 가정해야만 된다.
암몬 자손과의 싸움(10장)은 다윗이 싸운 여느 전쟁보다도 더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다음 장들에서 이렇게 한 이유가 분명히 드러난다. 암몬 자손들이 다윗의 사자들에게 한 행동은 그 당시에 할 수 있는 최대의 모욕이었다. 전쟁이 곧 일어나게 되자 그들은 용병(아람인)을 고용해서 이스라엘을 대항하도록 했다. 그래서 요압은 군대를 나누어 그들 사이에 연락을 확실하게 취하도록 하면서, 일부는 훤히 트인 지역에서 싸우고, 일부는 랍바 성의 군사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9-14절). 아람인이 패주하자, 요압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14절).
다음 구절들에서(15-19절) 하닷에셀이 다윗과 전쟁을 벌인 것이 나온다. 아람 동맹군을 모아서 다윗과 그 군대에 대항했으나 전혀 적수가 안 되었다. 그들은 패하게 되자 화친하였다. 구약성경에서 수리아인으로도 알려진 아람인은 메소포타미아의 앗수르인과는 점차 구별되어지게 된다. 이 시대 이전에는 아람인들은 앗수르인 근처에 살았다. 이 집단은 둘로 나뉘어졌다. 한쪽은 남쪽으로 이주했고, 나머지 한쪽은 앗수르 근처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에 남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남방으로의 이주와 관련이 있다. 후에 그들은 다메섹을 수도로 하는 강력한 왕국으로 통합되었다.
9장에서는 요나단에 대한 사랑 때문에 사울가에 쏟는 다윗의 관심이 이야기된다. 그의 이런 행동에서 부수적으로 얻는 바는 사울의 유일한 합법적 계승자들을 예루살렘에 거하게 함으로써 왕국을 다시 찾고자 하는 기회를 전혀 주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얄궂게도 다윗의 왕좌를 잠시 탈취한 자는 다윗 자신의 아들이다. 21장의 이야기는 벌써 일어난 사건이고, 필시 이 사건 때문에 요나단을 위해 그 후손을 서둘러 찾아서 그에게 큰 호의를 베풀게 되었을 것으로 가정해야만 된다.
암몬 자손과의 싸움(10장)은 다윗이 싸운 여느 전쟁보다도 더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다음 장들에서 이렇게 한 이유가 분명히 드러난다. 암몬 자손들이 다윗의 사자들에게 한 행동은 그 당시에 할 수 있는 최대의 모욕이었다. 전쟁이 곧 일어나게 되자 그들은 용병(아람인)을 고용해서 이스라엘을 대항하도록 했다. 그래서 요압은 군대를 나누어 그들 사이에 연락을 확실하게 취하도록 하면서, 일부는 훤히 트인 지역에서 싸우고, 일부는 랍바 성의 군사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9-14절). 아람인이 패주하자, 요압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14절).
다음 구절들에서(15-19절) 하닷에셀이 다윗과 전쟁을 벌인 것이 나온다. 아람 동맹군을 모아서 다윗과 그 군대에 대항했으나 전혀 적수가 안 되었다. 그들은 패하게 되자 화친하였다. 구약성경에서 수리아인으로도 알려진 아람인은 메소포타미아의 앗수르인과는 점차 구별되어지게 된다. 이 시대 이전에는 아람인들은 앗수르인 근처에 살았다. 이 집단은 둘로 나뉘어졌다. 한쪽은 남쪽으로 이주했고, 나머지 한쪽은 앗수르 근처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에 남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남방으로의 이주와 관련이 있다. 후에 그들은 다메섹을 수도로 하는 강력한 왕국으로 통합되었다.
Wednesday, October 15, 2008
아름다운 찬양모음
01. 진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02. 예수 이름 불러봅니다/이종익
03. 파송의 노래
04. 바람속의 음성/시와 그림 3집
05. 상처입은 치유자/김도균 1집
06. 주님의 숲/사랑이야기2집
07. 송정미5집/친구
08. 나의 슬픔 변하여/김동균
09. 조수아 2집/약할때강함되시네
10. 보혈을 지나/김도훈
11. 여호와 우리 주여/박종호
12. 내 이름 아시죠/Disciples 1집
13. 나 약해있을때에도/Story-2
14. 나의 안에 거하라/류수영 1집
15. 은혜의 이슬/소리엘
16. JOY/소리엘
17. 주 하나님 간절히 바랍니다/송정미
18 .주만 바라볼지라
19. 빈들에 마른 풀 같이
20.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21.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22. 이산지를 내게 주소서/믿음의 가정(남편을위한)
23. 야베스의 기도/장윤영
24. 유 스마일 돈 크라이/한스밴드
25. 내 이름 아시죠/믿음의 가정(자녀를 위한)
26. 예수 경배하리/올네이션스 침묵기도 5집
27. 주께 나아가세/올네이션스 침묵기도 6집
28. 보혈을 지나/김도훈 워십 2집
29. 온 천하 만물 우러러, 참 아름다와라/송정미 3집
30. 아 하나님의 은혜로/한국찬송가전집
31. 힘들어 혼자 울고 있을때/유선미
32.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바이올린 연주
33. 견딜만한 아픔을 주시는 이/신형원
34.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예수원 가는길
35. 야곱의 축복
36. 예수/에이멘 5집
37. 주님의 시간에
38. 호산나(약한나로 강하게)
39. 우리우리 주님은/소리엘
40. 베드로의 고백/박종윤,김석균
41. 새벽날개 1/박종호
42. 다윗과 요나단/요한의 아들 시몬아
43. 그 사랑 흘러 흘러/헌신 2000
44. 주여 이 죄인이/전용대
45. 구원의 축복을 노래하자/최미3
46. 당신을 위한 사랑이죠/동방현주
47. 나의 마음을 정금과 같이/유다지파
48. 오늘 / 김석균
49. 멈출 수 없는 사랑
50. 내 안에 사는 이/마음의 고백 2집
<요한복음 11:17 - 11:27> 일곱 번째 ‘표적’: 나사로를 살리심
‘나흘’(17절)은 나름대로의 충분한 의미를 가지는 기간이었다. 그 당시 민간에는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사람을 몸에 머물다가 떠난다는 신앙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흘째 되는 그 날에는 나사로가 정말로 죽었다는 것이 기정사실이 되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죽은 자의 집을 방문에서 유가족을 위로하는 것을 중요한 의무로 생각했던 까닭에, 나사로의 집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와 있었다(19절). 예수님은 마중나온 마르다에게 진심어린 위로의 말씀을 하셨다. 하지만 그것은 애도의 말씀은 아니었다.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이라는 말로 서운한 빛을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는 존경하는 선생님께 대한 간절한 믿음이 담겨 있었다. 물론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39절). 예수님은 마지막 날 모든 사람이 부활할 것이라는 바리새인들의 신앙을 가지고 있던 마르다에게, 삶을 변화시키는 진리를 가르치신다. 예수님은 그렇게 먼 미래에 대한 막연한 소망이 이제 막을 내렸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부활과 생명이 의미하던 모든 것이 당신 안에 있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단순히 생명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생명이라는 말씀이다. “나는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비록 육체의 죽음을 경험하더라도 곧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육체의 죽음이란 이제 지평선으로 들어가는 문에 불과하다. 그들이 향해 가는 곳은 해지는 곳이 아닌 해 돋는 곳이다.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부터 죽음이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간다’(모리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더욱 강조하시기 위해서 26절과 같은 역설적인 말씀을 하신다. 과연 신자에게 대해서는 육체의 죽음이 그 실체와 최종성을 잃는 것이다.
마르다는 과연 이 엄청난 새로운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을까? 그녀는 매우 강조적인 어조로‘내가 믿나이다’라고 대답한다(27절)-헬라어에서는 동사에 주어의 인칭이 나타나므로 강조할 목적 이외에는 주어를 따로 표기하지 않는다. 또한 ‘믿나이다’라고 했을 때 그 말이 현재시제로 씌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실제로는 완료형으로 씌어서, 그것이 ‘일단 생긴 뒤로는 영원히 남아 있는 믿음임을 보여 준다’(모리스). 마르다는 예수께서 그리스도 곧 메시야임과, 하나님의 아들임(1:34,49;20:31)을 믿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 온 분으로 믿었다는 말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죽은 자의 집을 방문에서 유가족을 위로하는 것을 중요한 의무로 생각했던 까닭에, 나사로의 집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와 있었다(19절). 예수님은 마중나온 마르다에게 진심어린 위로의 말씀을 하셨다. 하지만 그것은 애도의 말씀은 아니었다.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이라는 말로 서운한 빛을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는 존경하는 선생님께 대한 간절한 믿음이 담겨 있었다. 물론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39절). 예수님은 마지막 날 모든 사람이 부활할 것이라는 바리새인들의 신앙을 가지고 있던 마르다에게, 삶을 변화시키는 진리를 가르치신다. 예수님은 그렇게 먼 미래에 대한 막연한 소망이 이제 막을 내렸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부활과 생명이 의미하던 모든 것이 당신 안에 있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단순히 생명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생명이라는 말씀이다. “나는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비록 육체의 죽음을 경험하더라도 곧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육체의 죽음이란 이제 지평선으로 들어가는 문에 불과하다. 그들이 향해 가는 곳은 해지는 곳이 아닌 해 돋는 곳이다.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부터 죽음이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간다’(모리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더욱 강조하시기 위해서 26절과 같은 역설적인 말씀을 하신다. 과연 신자에게 대해서는 육체의 죽음이 그 실체와 최종성을 잃는 것이다.
마르다는 과연 이 엄청난 새로운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을까? 그녀는 매우 강조적인 어조로‘내가 믿나이다’라고 대답한다(27절)-헬라어에서는 동사에 주어의 인칭이 나타나므로 강조할 목적 이외에는 주어를 따로 표기하지 않는다. 또한 ‘믿나이다’라고 했을 때 그 말이 현재시제로 씌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실제로는 완료형으로 씌어서, 그것이 ‘일단 생긴 뒤로는 영원히 남아 있는 믿음임을 보여 준다’(모리스). 마르다는 예수께서 그리스도 곧 메시야임과, 하나님의 아들임(1:34,49;20:31)을 믿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 온 분으로 믿었다는 말이다.
<요한복음 11:28 - 11:37> 슬픔을 아시는 구주
본문에서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깊은 동정심을 품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분의(그리고 하나님의)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 보게 된다(그것은 또한 우리 모두를 향해 품으신 마음이기도 하다). 이 모습은 신들이 ‘고립되고, 열정도 없고, 동정심도 없는’(바클레이), 한마디로 감정이 없는 줄로 알고 있던 헬라의 독자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계시였다. (a)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사람을 보내 마리아가 집에 가득 모인 호곡하는 사람들에게서 떠나 잠시라도 자기와 함께 있도록 하신다(28절). (b) 예수님은 마리아와 그녀를 따라온 자들이 슬피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셨다. (c) 나사로가 묻힌 곳에 함께 가자는 말씀을 들으실 때도 눈물을 흘리셨다. (d) 무덤 앞에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통분히 여기셨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으나 이 모든 일이 있은 후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셨다. 이로 보건대, 그 기적은 단순히 기계적인 행위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그 분은 진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신 분이다(사53:4;마8:17). 그 권능의 역사 하나 하나마다 그 분에게 어떤 대가를 요구했다(막 5:30).
마르다가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른 데에서(28절), 우리는 그 분이 베다니의 이 가정을 성경에 기록된 것 이외에도 여러 차례 방문하셨음을 다시 한 번 짐작하게 된다. 예수님이 그 여인들에게 랍비가 되어 주신 이 사실은, 그 당시 여자들을 가르치기를 거부했던 랍비들의 태도와는 크게 대조된다. 그러나 이때는 그들을 조용히 가르칠 상황이 아니었다. 그 집은 사람들로 북적대고 호곡소리로 가득했다. (이런 광경은 35절에서 보는 대로 예수께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과 대조된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셨는데(33절), 이것은 전에 없던 강렬한 감정의 표시이다(타스커). ‘그것은 예수께서 사람들의 운명에 깊이 가담하사 친구들의 슬픔을 자기의 슬픔으로 삼으셨음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모리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을 볼 때, 죽음의 권세를 가진 자와의 싸움을 눈앞에 두고 계시던 상황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참조.12:27;13:21). 예수님은 결전을 예비하는 전사(戰士)로서 나사로의 무덤을 향해 가셨다(칼빈).
마르다가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른 데에서(28절), 우리는 그 분이 베다니의 이 가정을 성경에 기록된 것 이외에도 여러 차례 방문하셨음을 다시 한 번 짐작하게 된다. 예수님이 그 여인들에게 랍비가 되어 주신 이 사실은, 그 당시 여자들을 가르치기를 거부했던 랍비들의 태도와는 크게 대조된다. 그러나 이때는 그들을 조용히 가르칠 상황이 아니었다. 그 집은 사람들로 북적대고 호곡소리로 가득했다. (이런 광경은 35절에서 보는 대로 예수께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과 대조된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셨는데(33절), 이것은 전에 없던 강렬한 감정의 표시이다(타스커). ‘그것은 예수께서 사람들의 운명에 깊이 가담하사 친구들의 슬픔을 자기의 슬픔으로 삼으셨음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모리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을 볼 때, 죽음의 권세를 가진 자와의 싸움을 눈앞에 두고 계시던 상황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참조.12:27;13:21). 예수님은 결전을 예비하는 전사(戰士)로서 나사로의 무덤을 향해 가셨다(칼빈).
<요한복음 11:38 - 11:44> 예수님이 죽음을 몰아내시다
어떤 문학작품이라도 능가할 이 드라마를 기록하는 데에는 오직 열 일곱 절이 씌었을 뿐이다. 요한의 글은 꼭 필요한 내용만 실으므로써 눈에 띄게 간결하다. 당시의 무덤은 바위를 앞에서 깊이 파내고, 입구는 크고 평평한 돌로 막아 놓은 형태였던 것의 거의 분명하다. 예수님은 무덤 앞에 이르시자 다시 심령에 통분함을 느끼셨지만, 지체하지 않으시고 무덤을 막은 돌을 치우라고 하셨다. 그 순간 전율을 일으킬 정도로 경이로운 정적(靜寂)이 있었으리라고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정적을 깨고 마르다가 합리적인 이의를 제기했다(39절)- 예수님께 대한 그녀의 믿음은 한이 없었으나, 반면에 분명치 못했다. 예수님은 얼마전에 사람을 보내 그녀에게 분명히 하신 말씀(4절)을 상기시키신다. 예수님은 마르다 역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동일한 목적에 생각이 고정되어 있기를 바라셨다. 예수님이 지금 하시려는 일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또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권능을 사람들 앞에 장엄하게 나타내시려는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들에게 보여 깨닫게 하시려는 데에도 그 목적이 있었다. ‘군중들은 그 기적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그 기적의 진정한 의미 곧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모리스).
이 일을 염두에 두고서, 예수님은 눈을 들고서(아마 큰 소리로)항상 아버지와 나누시던 대화의 일부인 것이 거의 틀림없는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은 먼저 아버지께서 기도를 들어 주신 것을 감사하신다(41절)-기록되지는 않았으나, 아마 이 상황에 처음 임하셨을 때 기도를 하신 것 같다. 그러고는 아버지께서 항상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확신을 표하신다. 그 분은 항상 아버지와 함께 고통을 나누시며 대신 일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렇게 주위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기도하신 것은, 자신이 스스로를 위해서 일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요 대리인임을 깨닫게 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요한은 기적을 기록하기에 앞서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하기를 바란다. 그런 뒤, 예수님은 큰소리로 나사로를 부르셨다(43절). 이렇게 함으로써 주위의 모든 사람이 그 소리를 들었고, 나사로가 살아난 원인에 대해서 이론(異論)이 생길 여지가 없었다(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시기 전에는 이렇게 큰 소리를 사용하시지 않으셨다). 그 소리를 듣고 죽은 자가 무덤에서 걸어 나왔다-그의 생명은 사망과 음부의 열쇠(계 1:18)를 쥔 분에 의해서 되돌아온 것이다. 예수님은 오직 그의 대권만을 행사하셨다. 경외심에 사로잡혀 넋을 잃고 바라보던 나사로의 친구들은 주님의 말씀에 정신을 차리고 나사로의 목에서 붕대를 풀어 주었다.
이 일을 염두에 두고서, 예수님은 눈을 들고서(아마 큰 소리로)항상 아버지와 나누시던 대화의 일부인 것이 거의 틀림없는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은 먼저 아버지께서 기도를 들어 주신 것을 감사하신다(41절)-기록되지는 않았으나, 아마 이 상황에 처음 임하셨을 때 기도를 하신 것 같다. 그러고는 아버지께서 항상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확신을 표하신다. 그 분은 항상 아버지와 함께 고통을 나누시며 대신 일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렇게 주위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기도하신 것은, 자신이 스스로를 위해서 일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요 대리인임을 깨닫게 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요한은 기적을 기록하기에 앞서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하기를 바란다. 그런 뒤, 예수님은 큰소리로 나사로를 부르셨다(43절). 이렇게 함으로써 주위의 모든 사람이 그 소리를 들었고, 나사로가 살아난 원인에 대해서 이론(異論)이 생길 여지가 없었다(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시기 전에는 이렇게 큰 소리를 사용하시지 않으셨다). 그 소리를 듣고 죽은 자가 무덤에서 걸어 나왔다-그의 생명은 사망과 음부의 열쇠(계 1:18)를 쥔 분에 의해서 되돌아온 것이다. 예수님은 오직 그의 대권만을 행사하셨다. 경외심에 사로잡혀 넋을 잃고 바라보던 나사로의 친구들은 주님의 말씀에 정신을 차리고 나사로의 목에서 붕대를 풀어 주었다.
Wednesday, October 1,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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