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September 19, 2008

절망의 골짜기에 부는 생기

☞ 마른 뼈 골짜기(37:1~10)
하나님은 에스겔을 한 골짜기로 데려가셨습니다. 그곳은 치열한 전투로 몰살된 시신들이 마른 뼈가 되어 널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3절)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실낱 같은 희 망마저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에스겔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께서 아시나이다”(3절). 인간의 편에서 보면 절망뿐이지만,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희망이 있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에게 믿음의 행동을 요구하셨습니다. ‘대언하라 …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어떤 절망도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사랑을 소멸시키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마른 뼈들로 군대를 만드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생명의 샘물을 퍼 올리시는 분입니다.

☞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37:11~14)
하 나님의 말씀은 결코 허공을 치지 않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고통 당하고 절망하는 그분의 백성을 향한 사랑의 권면입니다. 말씀은 생명이고 구원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포로 생활로 인해 지쳐 자포자기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강하게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덤 같은 현실에서 나와 약속의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명예를 걸고 그분의 백성을 향한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결코 식언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나타내시기 위해서라도 그분의 백성을 절망에서 건져 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때 구원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 마른 뼈처럼 느껴질 때
‘마른 뼈’의 심정은 누구나 한 번쯤 겪는다. 잔잔할 날이 없는 직장 생활, 가정의 짐이나 자녀의 반항, 고통으로 신음하는 몸 등이 모두 마른 뼈의 상태를 초래한다. 삶의 예기치 못한 반전, 안팎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혹평도 우리를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간다. 그럴 때 우리는 기쁨이나 희망 없이 그냥 질질 끌려 다닌다. 그러면 성장이나 대인 관계를 위해 노력하려는 의욕도 상실하게 된다.
하루가 시작되기 전에 지친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날 때면 우리는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고이 품어 주시며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는 하나님을 그려 볼 수 있다. 우리는 하루를 사는 중에도 잠시 멈추고 자신의 지친 호흡에 주목해 볼 수 있다. 이런 잠깐의 시간들이 우리를 생명의 호흡 되시는 하나님과 이어 준다. 마른 뼈 안에 생명이 숨어 있다고 믿기가 항상 쉽지만은 않다. 마른 뼈가 다시 춤추게 될 것을 믿으려면 큰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에 대해 인내하는 것도 그중에 하나다.
우리는 마른 뼈의 심정에 부딪힐 때마다 인내와 희망을 품고 죽음의 골짜기에 들어서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새로운 삶을 창조하도록 도우신다. 우리의 감정과 행동을 낡은 틀에 머물게 할 필요가 없다. 생기의 창조자, 생명을 주시는 그분께 우리 자신을 드리자. 이 경험은 우리를 하나님의 심장 속으로 더 깊이 이끌어 줄 것이다.

<에스겔 37:1 - 37:14> 죽음에서 생명으로

에스겔서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 환상은 동료 포로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우리의 뼈들은 말랐고 ..."(11절)라는 말과 연결되었다. 절망에 대한 이 생생한 표현은 예루살렘이 함락된 직후, 그러니까 거짓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고, 에스겔의 결정적인 희망의 가르침이 영향을 주지 않던 시기를 암시한다. 14절은 36:27이 이미 알려졌음을 암시한다.

여호와의 손에 사로잡힌 선지자는 맨 처음 사명을 받았던(3:22) 골짜기 혹은 들(RSV 난하주)로 다시 이끌림을 받는다. 그곳에는 이미 오래 전에 살과 골수가 사라져버린 사람 뼈들로 가득했다. 어디를 가나 보이는 것은 죽음뿐이었다. 그 뼈들이 다시 살 수 있겠느냐는 여호와의 질문(3절)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제기했으나 아무런 분명한 대답을 받지 못했던 질문이었다(비교, 욥 14:14). 이 환상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에스겔을 시켜서 이 마른 뼈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게 하신다. 그 말씀은 능력이 있어서 그대로 이루어진다. 뼈들이 모여 골격을 이루고, 힘줄과 살이 그 위에 붙되 다만 생기만 없을 뿐이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지시대로 생기(히브리어, 루아흐. '생기'와 '바람'을 모두 뜻함)를 부르며, 그 결과 죽음을 당한 사람들이 다시금 산 군대가 된다(10절). 참으로 역동적인 부활 장면이다.

그러나 이 환상에 대한 해석(11-14절)은 그 의미를 죽은 사람들에게 적용하지 않고 이스라엘 족속의 살아있는 백성에게 적용한다. 당시에 알려진 세계에 흩어진 백성, 특히 에스겔이 목회하던, 바벨론에서 송장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고 불평하던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이다. 그 환상은 그들에게 유다로 돌아가는 것이 진짜일 것임을 확신시켜 주되, 바벨론이라는 무덤을 열고 그들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신(神)께서 하시는 일임을 깨닫게 해 준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은 그 땅에서 미래가 있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이루어진 것만큼 좋은 일이며(14절), 이제 희망을 가질 이유가 있다. 하지만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이와같은 에스겔의 복음을 듣게 되기에 앞서 깊은 절망을 겪어야만 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유익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비추어볼 때 그 환상은 에스겔이 깨달을 수 있었던 최대한의 내용보다 훨씬 놀라운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고전 15:51-57).

에스겔 37장 주석


에스겔 37장 주석 1

에스겔 37장 주석 2

에스겔 37장 주석 3

Wednesday, September 10, 2008

<사무엘상 2:12 - 2:36> 하나님께서 말씀하심

이제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숨 가쁘게 진행된다: 사무엘의 출현과 소명, 엘리 집안의 몰락과 배척당함. 본문은 세 단락으로 나뉘어진다: 엘리의 아들들이 죄; 사무엘과 그 어머니; 엘리에게 온 하나님의 사자. 사무엘서의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는 흡니와 비느하스의 부도덕한 행위를 이야기해 가는 가운데 유쾌한 이야기를 삽입함으로 아름답게 구성되어 있다. 소년 사무엘은 제사장 복장을 하였으며(18절), 그 어머니가 매년 새옷을 지어다 주었다. 엘리의 축복을 받았고(20절), 한나는 여호와의 은총의 표시로서 다른 자녀를 얻었다(21절). 사무엘의 성장을 언급하면서 26절에서는 그가 신체적인 성장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았다는 것도 첨가하고 있다(눅2:52의 예수님과 비교해 보라).

여 호와께 대한 이런 은밀하게 계속되는 헌신은 엘리의 아들들의 악한 삶을 뚫고 비치는 한 줄기 광선과도 같으며, 여호와께서 당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엘리의 아들들은 거룩한 율법을 깨뜨렸다; 날고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여호와보다 자기들이 먼저 취해 갔다. 사실상 협박에 의해 빼앗아 간 것이다(16절). 그들은 회막문을 깨끗이 하는 여자들과 동침하였다(22절). 엘 리가 그 아들들에게 충고를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그 말을 듣지 않는 것을 보고 오늘날에도 주의해야 할 엄중한 경고를 한다(25절).

익명의 여호와의 사자(사람)가 와서 심판을 선언한다. 그 당시에는 편지를 쓰면 그것을 전달할 사람(a messenger)이 필요했다. 때때로 전달자를 통해 구두 편지가 전해지기도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전달자를 보낸 자의 대리인이 되었고 보낸 자와 똑같은 위치에 섰다. 자기를 보낸 자의 권위를 그대로 조장하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대답도 하였다. 편지가 어떤 형식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달자의 말’도 어떤 양식에 따랐다. 구약성경과 고고학에서 이런 예를 많이 접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데서 우리는 여호와의 전달자로서의 선지자의 중요성을 더욱 인정하게 되며, ‘그러므로 여호와의 전달자로서의 선지자의 중요성을 더욱 인정하게 되며, ’그러므로 여호와가 말하노라....백성아 귀를 기울일지어다‘라고 말하는 이유도 알게 된다. 그 메시지(27-36절)는 불신실함 때문에 엘리의 제사장 직분을 빼앗으시겠다는 심판이며, 그것은 또한 신실한 한 제사장을 세우시겠다는 암시이다(35절). 직접적인 암시는 사무엘이 이 역할을 대신할 것이라는 것이 되겠는데, 사무엘은 이미 성전 봉사를 통해 훈련받았기 때문이다. 이 약속은 사무엘만이 아니라 여호와의 집에서 봉사하는 모든 충성된 자들까지 포괄한다. 결국 이 약속대로 사독과 그 가족이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에서 봉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여호와께서 자기 나라에서 봉사하기에 합당한 자를 계속 찾으시며 준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있는 그 사람일 수 있다.

사무엘상 2장 주석


사무엘상 2장 주석 1

사무엘상 2장 주석 2

사무엘상 2장 주석 3

Tuesday, September 9, 2008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사무엘하 11:1 - 11:27> 11장 우리아를 죽임

봄이 되었다.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이 돌아왔으나 왕들은 죽음과 파괴를 몰고 오는 전쟁을 하러 나간다(1절). 왕은 뒤에 남아서 나라의 일을 유지하거나 어떤 다른 위협을 경계하는 일이 때때로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요압이 암몬 자손과의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서둘러 출전하여 랍바를 에워쌌다. 1절은 암몬과의 전쟁을 밧세바의 사건과 연결 짓고 있다.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가 그 군대의 장교라는 사실이 나중에 드러난다.

다윗과 밧세바: 이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 주변 세계에서는 흔히 볼 수 있게 된 것일지는 모르나 성경에서는 놀랄 만한 사건이다. 여호와께 대한 다윗의 헌신을 익히 아는 바다. 성경은 '그림 속의 성자‘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사람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여기서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일은 완전한 사람이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들의 일편 단심치 못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루신다.

다 윗과 밧세바 둘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밧세바가 드러내 놓고 목욕한 것에는 지부에서 보게끔 하려는 ‘의도’가 있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아는 바는 그 두 사람이 자기들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와 그 결과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도 간음했다는 사실이다. 우리아를 그 아이의 아버지인 것처럼 꾸밀 다윗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6-13절). 필시 궁중에서 일어난 추문은 밖으로까지 새어 나갔을 것이고, 우리아도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우리아의 말은 참된 용사의 말로서 다윗의 평소 태도에 어울리는 말이다. 다윗의 생은 그에게 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다윗으로서는 그 사건을 자백하든지 아니면 자기가 해를 끼친 그 사람을 죽이든지 하는 대안밖에 없는 것 같았다. 다윗은 후자의 방법을 택하게 되고, 우리아는 자기를 죽이라는 편지를 들고서 전쟁터로 돌아간다. 어떤 잘못을 숨기려 들다 보면 필연코 죄를 짓고 만다.

우리아는 전쟁에서 죽었다(16, 17절). 요압은, 그의 사자가 왕의 물음에 대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를 물을 때 우리아가 죽은 사실도 함께 보고하면 다윗이 요압의 전술에 대해 아무 말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21절의 격언을 주의하라(참조. 삿9:50-55). 27절 마지막 부분에 관심 하는 것이 좋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대한 생각도 없이, 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도 잊은 채 불신의 행동을 계속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어림없다.

이상하게도 다윗에게서 보는 바와 같이 사람들은 사람의 동기와 행동을 보시는 하나님보다 사람의 의견이나 평을 두려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