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ne 29, 2008

You raise me up





바울 신학의 특징

이신칭의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신약적 이해에 대한 바울의 가장 위대한 공헌은 하나님과 더불어 의에 놓여지는 방법에 관심을 둔 것이다. 바울에 의하면, 칭의란 율법으로 말미암이 아니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발생한다.

바울 신학의 주제이자, 바울이 전한 복음의 중심이며 기독교 자체의 가장 중심적인 내용은, 곧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일컫는다”(이신칭의)라는 말이다. 이는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단순히 믿는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접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이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소위 칭의의 교리가 가장 중요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인을 만드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통하여 사람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된다. 이를 부인하는 자는 진정한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고 오히려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대한 적수(Anti-Christ)가 되며, 인간의 헛된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바울신학의 특징은 사도가 쓴 13개의 서신서 중에서 특히 바울신학 사상의 진수라고 말할 수 있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갈라디아서를 중심으로 확증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진다.



Ⅱ. 바울신학의 특징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주된 목적은, 예루살렘 교회에 소속된 유대주의 순회전도자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찾아와서 바울 자신의 사도직과 복음의 진정성을 훼손시키고, 신도들에게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아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거짓된 복음을 가르침으로써 그들을 혼란시키고 있었다. 이에 격분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과 복음의 신적 기원을 말하고, 또 다시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받게 하리라고 반박하였다.

지난 수세기 동안 많은 성경학자들은 바울의 율법사용에 대한 구분을 함으로써, 예를 들면 율법주의적 율법과 하나님의 뜻의 표현으로서의 율법, 제의(祭儀)적 율법과 도덕적 율법, 혹은 모세의 ‘토라’(Torah; 율법)와 메시야적 토라를 구분함으로써 율법에 대한 바울의 어떤 불일치한 현상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바울이 아무도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고 단언할 때, 그는 전체로서의 율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그리하여 아무도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워질 수 없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주장한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다는 사상은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진정한 복음을 위한 전형이다. 바울은 단순히 종교적 이론이나 사상적 갈등 때문에 칭의론을 전개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이 서느냐 쓰러지느냐 하는 그리스도교 복음의 사활의 문제였다.



1. 바울의 율법관

루터가 말한 바울의 ‘율법과 복음’에 관한 올바른 이해는 성경의 진수를 아는 데 중심 요건이 된다. 바울이 일반적으로 말할 때 율법은 5가지 범주 내에서 사용된다. ① 모세의 율법(갈 3:13) ② 구약성경(롬 3:19) ③ 일반적 의미의 규범 또는 원리(롬 3:27) ④ 필요(롬 7:21, 23, 25) ⑤ 명령(갈 6:2) 등이다.

헬라어 ‘νoμος’(노모스)는 갈디아서에 32번 나오고 로마서에서는 무려 72번이나 나온다. 정관사가 첨부된 ‘o νoμος’(호 노모스)와 관사가 없는 ‘νoμος’(노모스)사이에는 의미상의 차이가 있다고 하여 전자를 모세의 율법으로, 후자를 일반법으로 보는가 하면, 전자를 모세의 율법으로, 후자를 모든 종류의 율법주의로 보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바울의 다른 서신의 경우에서처럼 갈라디아서에서도 의미상의 차이가 없이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볼 때(갈 3:11-12, 23-24), 이러한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바울에 있어서 율법은 언약의 백성에게 주신 생활의 규범일 뿐이지 의인의 규범은 아니었다. 율법은 언약에 대한 그의 일반적 태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옳다고 여김을 받은 사람에 대한 안내자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율법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은총을 밝히신 것과 분리되어, 인간의 의무에 근거하여 제시된 순전한 도덕률이 아니다. 율법은 하나의 표지(標識)된 선, 곧 이 선에 따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백성이나 그들의 생활 자체를 공개하는 선(線)이다.

따라서 바울은 단순히 그리스도 교회를 위해서 모세 율법을 새롭게 윤리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최종적으로 수립된 하나님의 뜻, 곧 시내산 율법과 종말론적으로 일치되며 또 그것을 완성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에로 그들을 부르는 것이다. 교회는 더 이상 모세의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열려진 생의 영적 생활질서 안에 있다(롬 8:2). 이는 그가 결코 율법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음의 법”으로 세운다고 할 때(롬 3:27-31),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더 이상 모세의 율법에서 드러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나타난다는 것을 말한다.

율법에 대한 바울의 논지는 율법이 존재하기 전, 따라서 죄가 성립될 수 있기 전에도 사람들이 계속해서 죽어야 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다는 사실의 증거가 된다. 아담의 죄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죄인으로 인정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께 온전한 의와 온전한 순종을 드렸다. 그래서 아담의 죄 안에 연관 되여 있던 인간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온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악하고 끝없이 계속되는 죄와 죽음의 결박 속에서 해방케 하였다(롬 8:1-2; 히 5:8-9).


2. 칭의

바울의 칭의교리는 ‘하나님의 의’(δίκαίοσvνη θεοv; 디카이오수네 데우)를 전제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의의 개념이 바울의 칭의교리의 핵심을 이룬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 할 것은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은 단순한 법정적인 개념 이상이라는 것이다. 즉 칭의란 죄의 용서를 선언한다는 것보다 더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죄의 용서를 바탕으로 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칭의라는 말은 생명이라는 말과 판단이라는 말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대리인, 그리고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에게 의롭다고 선포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의 총체이다. 우리가 이 단어의 용법을 따라 의롭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의롭다고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


3. 바울 복음의 진수

갈라디아서 1:11-12는 독점적이지는 아닐지라도 사도 바울의 복음의 기원을 말하고 있다. 그 주장인즉 바울의 복음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복음이란 바울이 갈라디아를 첫번 방문했을 때 갈라디아인들에게 전한 복음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의 복음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히려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그의 복음의 기원을 말하려 하는 것이다. “내가 전한 복음”이란 분명히 갈라디아의 거짓 선동자들이 선전하는 복음에 대한 대립개념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만일 바울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원사도들의 복음과 일치되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염두에 두었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의 일치성에 따르는 논리적 함정에 빠질지도 모른다. 적대자들의 주장은 사도 바울의 복음이 원사도들의 복음과 다르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바울의 복음을 적대한 것이다.

이하에서 ‘복음’이라는 말의 어원을 살펴봄으로써 ‘복음’이라는 말 자체가 인간의 사유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겠지만, 바울의 사유 가운데 있는 복음의 내용은 결코 그 자신이 창작해낸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배운 것도 아니고, 다만 그가 다메섹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함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바울은 갈 1:1과 병행되는 갈 11:12에서 바울이 전파한 복음이 왜 참된 그리스도의 복음인지, 왜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는지를 갈 1:11-12와 갈 1:1이 똑같은 병행 구절을 사용하여 자신이 전파한 복음의 신적 기원을 강조한다. 우리가 바울 자신의 서신과 사도행전을 통하여 그릴 수 있는 그림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의 모든 생애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데 헌신하였고 그 복음을 위해 살다가 마침내 그 복음 때문에 순교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복음(유앙겔리온)이라는 말의 사전적(辭典的) 정의(定義)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선포하는 일이다.

신약성서에서 ‘유앙겔리온’이라는 낱말을 제일 처음 사용한 것은 사도 바울이다. 그는 이 말을 다만 기쁜 소식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복음의 내용을 일별하여 보면 먼저, ‘유앙겔리온’이란 복음을 전파한다는 전도활동과 관련해서 사용된다. 여기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자를 일컫는다. 다음으로 바울이 사용한 복음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롬 1:3). 따라서 바울이 사용한 복음의 실체를 파악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관을 살펴봄으로써 복음의 구체적인 의미를 알 수 있다.



Ⅲ. 맺음말


사도 바울의 갈라디아서는 율법문제로 인하여 복음을 놓쳐버린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에 기초하여 성령에 의한 성숙한 신앙을 가르치기 위해서 쓴 서신이다. 당시의 유대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의 12제자가 아닌 바울이 전한 복음은 진정한 복음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들의 주장은 율법과 함께 할례를 받고 그들의 절기를 지켜야 변화된 생활, 즉 온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갈 1:6 )라고 바울은 경탄하였다.

사도의 서신 중에는 무엇이 복음이라고 정의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복음은 그 복음의 출처인 “신적 기원”(갈 2:3-4, 21)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함께 모세의 율법과 아울러 유대교의 전통인 할례를 곁들여야 온전한 복음이 된다고 거짓 교사들의 꾀임에 빠져 들어간 갈라디아 교인들은 혼란에 휘말리게 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사도행전 15장에서 보듯이 사도의 제1차 전도 여행이 끝난 후, 안디옥 교회에서 논쟁하다가 결국 예루살렘 총회에 상정되었다. 거기서 모든 사도들과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는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율법의 강요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행 15:19-20). 바울은 바로 이 결정을 모든 교회에 알려줌으로써 그리스도의 교회를 굳건한 복음 위에 세울 수 있었다.

Friday, June 20, 2008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삶


추천 도서 : 예수와 바울


한국이 나은 세계적인 신학자 김세윤 박사의 논문집입니다. 논문집 성격상 약간은 딱딱한 느낌이 있으나, 여러 주제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느껴지는 탁월한 작품이란 생각이 듭니다. 새순 도서관에서 대여 가능합니다.

Thursday, June 19, 2008

믿음 앞에선 칼뱅 웨슬리 한 형제

믿음 앞에선 칼뱅 웨슬리 한 형제
연중기획-감리회 신앙전통세우기 18
2007년 09월 06일 (목) 12:02:17 기독교타임즈 webmaster@kmctimes.com

이 질문은 양 교파의 창시자인 칼뱅과 웨슬리의 구원론을 짚어봄으로서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흔히 장로교는 이중 예정론을, 감리교는 만인 구원설을 표방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이 두 입장을 대조시켜 보고자 합니다. 칼뱅은 바울-어거스틴-루터의 신학 노선을 이어 받아 이중 예정론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모든 인류를 구원받을 사람들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 이중으로 미리 정해놓으셨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선교 사역을 위해서 제사장, 선지자, 왕, 사도, 목사, 교사, 등 특별한 성직자들을 미리 뽑으신다는 특수 예정론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으나 모든 인류를 나기 전부터 이중으로 예정해 놓으셨다는 일반 예정론은 웨슬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예정론은 흔히 '‘TULIP’으로 요약되는바 칼뱅 신학의 5대 강령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첫째로, ‘Total Corruption’, 즉 ‘전적인 타락’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인간은 단지 악을 선택할 자유만 남았다는 것이지요. 여기에 대해서 웨슬리는 비록 인간이 타락하기는 했지만 모든 인간에게 우주적으로 주어져 있는 선재 은총 때문에 선악간에 판단할 수 있는 양심과 자유의지가 회복되었음을 강조합니다.

둘째로, ‘Unlimited Election’, 즉 ‘무조건적인 선택’입니다. 인간의 구원과 멸망이 인간 편에서의 윤리적 결단이나 선택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하여 무조건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결정론 혹은 숙명론에 대해서 웨슬리는 인간의 구원과 멸망이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 편에서의 신앙과 불신앙에 따라 좌우된다는 조건적 선택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믿지 않으면 멸망당한다고 보았던 것이지요.

셋째로, ‘Limited Atonement’, 즉 ‘제한적 속죄론’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은 영생으로 미리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라는 가르침이지요. 다시 말해 그리스도는 구원으로 예정된 사람들만을 위해서 속죄의 고난과 죽으심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웨슬리는 만인 속죄론 혹은 무제한적 속죄론을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구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으므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속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Irresistible Grace’, 즉 ‘불가항력적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절대적으로 항거할 수 없으므로 그대로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구원과 영생으로 예정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꼼짝없이 받아들여 무조건 구원받을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는데 주목적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알미니안주의자인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라고 역설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총은 자동인형이나 로봇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에 의해 수용될 수도, 거부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Perseverance of Saints’, 선택받은 성도가 무조건적으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보장, 즉 ‘견인적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에 따라 한 번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은 모든 인간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영원토록 구원의 길에서 떨어지지 않고 반드시 구원을 받게 된다는 보장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웨슬리는 비록 구원받은 성도라고 할지라도 지속적인 은혜 생활을 하지 못할 경우 얼마든지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길에 들어섰다고 해서 이제 영적 엘리트가 되었음으로 하등의 성결 노력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정적 신비주의 혹은 반 율법주의적 수동주의를 경계합니다.

칼뱅의 이중 예정론은 많은 신학적인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인류를 구원하길 원하시며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보편성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더욱이 구원과 멸망의 문제에 있어서 인간 편에서의 책임은 물을 수 없고 모든 궁극적인 책임은 하나님께로 집중되고 맙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보기에 별 문제가 없겠지만, 멸망으로 예정된 사람은 자신의 의사나 선택과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에 의해 일방적으로 그 운명이 정해져있기 때문에 아무 책임을 물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다시 전도 혹은 선교 무용론으로까지 연결됩니다. 영생의 길로 예정된 사람들에게 전도는 받든 안 받든 반드시 구원에 이르고야 말도록 운명 지워졌기 때문에 아무 쓸모없는 과잉이 될 터이고, 멸망의 길로 예정된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열심히 복음을 들어도 구원받을 수 없기에 하나의 조소거리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지요.

물론 이런 약점을 피하기 위하여 누가 영생으로 혹은 멸망으로 예정되었는지 미리 알 수 없다는 조건을 달지만, 예정론이라는 말 그 자체가 이미 피할 수 없는 숙명성을 내포하고 있기에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하여 인간 편에서 애쓰는 동기와 수고는 자연 꺾일 수밖에 없습니다. 웨슬리는 예정론의 이와 같은 오류를 환자와 약의 비유를 들어 지적합니다. 환자가 의사가 손을 쓸 겨를도 없이 죽거나 살도록 미리 결정되어 있다면 약을 쓸 필요가 어디에 있느냐는 반문이지요.

결국 성서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웨슬리가 표방한 만인구원설이 칼뱅의 예정론보다 훨씬 더 건전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천재 신학자였던 칼뱅이 예정론의 약점을 몰랐을 리 없으며 다만 목회를 해보니 도무지 구원의 길에 동참하지 않은 고집 사나운 사람들이 있기에, 즉 현실적 목회 경험에서 예정론을 내세웠던 것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이 뚜렷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칼뱅과 웨슬리에게 머리카락 한 올의 차이도 없는 것이 있으니 오직 믿음으로 의로워지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종교개혁의 대원리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칼뱅이나 웨슬리는 한 배를 탔던, 개혁주의의 아들들이었습니다.

성경 주석 : 누가복음 10장

누가복음 10장 주석 1

누가복음 10장 주석 2

누가복음 10장 주석 3

Thursday, June 12, 2008

아침 안개 눈앞 가리듯


믿음과 중생의 인과관계

지난주 믿음과 중생의 인과관계에 대한 열띤 토론 후, 나름대로 묵상의 시간을 갖고 느낀 바를 몇 자 적고자 합니다. 제자반 여러분과 함께 Share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선택된 우리는 중생을 받고, 믿음에 이른다는 주장에 아직도 100%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토론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런 인과관계 안에서는 우리의 자유의지는 무시되고, 우리가 예수를 주로 시인하면, 영생의 선물을 받는다는 성경의 말씀과 약간 차이를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관점의 차이임을 이번 주 성구암송을 하면서 느끼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9절에는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구원의 Process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예비하신 구원에 우리가 믿음으로 응답하면, 중생과 영생의 선물을 받는다는 내용 같습니다. 즉, 구원의 Process는 은혜로 인해 initiate된다는 점에서는 주체가 우리의 믿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분명해 집니다. 그에 대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할 수도 무시할 수도 있으니, 자유의지도 설명이 되는것 같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면, 선물로써, 중생과 영생을 받는다는 자연스러운 인과관계가 설명될 수 있는것 같습니다. 이런 인과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인간의 노력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9절 말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이 자연스럽게 이해 됩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준비 없이는 우리의 어떠한 믿음의 노력도 결실을 맺을 수 없다는 뜻 같습니다. 면벽하여 참선하는 스님들이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예로 풀어보면, 내가 수학문제를 풀때, 형이나 선생님이 자세히 가르쳐 주고, 나를 믿고 그대로 한번 풀어보라고 했을 때, 내가 믿고 답을 얻었다면, 이것은 나의 노력때문이 아니라, 형이나 선생님의 은혜(?, 도움이라고 해야겠죠) 때문이라 할 수 있겠죠. 물론 나의 의지로 받아 들였으니, 기계적으로 나에게 답이 주어진 것도 아니고요.

중생이 선행되지 않고 믿음에 의해서 중생이 된다면, 나의 의지가 너무 강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관점은 하나님의 은혜가 선행되면, 믿음다음에 중생에 와도 나의 의지가 강조되지 않을 수 있다는 반론으로 설명이 될 수 있을것 같습니다. 물론, 저희 관점은 전혀 신학적 바탕이 없는 것으로 여러분의 반론이 있을거라 느껴지고, 또 기다려 집니다. 너무 데카르트식 연역법에 근거한 저의 접근이 무모하게 느껴지는 분이 계실지 모르나, 빠른 시간안에 짧은 인간적 지식과 인간적 언어로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절대적 진리로 부터 논쟁을 시작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해 몇자 적어 봅니다. 여러분의 반론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