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November 26, 2008
Tuesday, November 11, 2008
Thursday, November 6, 2008
<누가복음 15:11 - 15:32> 잃어버린 두 아들
이 비유는 보통 ‘탕자의 비유’라고 하지만, 그것은 이 비유를 잘못 이해하는 데로 이끌고 같다. 왜냐하면 이것은 ‘두 아들을 가진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 요점은 부분적으로는 이 두 아들을 비교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의 중심 논제는 인간관계이다. 배경은 친숙한 한 가정 상황이다. 두 자녀는 서로가 너무 다르다. 하나는 책임감이 있고, 가정을 사랑하며, 부지런하다. 다른 하나는 충동적이고, 조금이라도 매이지 않으려고 한다. 둘 다 서로에 대해서는 냉소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며, 사이가 벌어져 있다. 그 둘의 공통된 운명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이 두 형제를 대조할 수 없다. 그들은 모두 잃어버린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작은 아들이 잃어버린 아들임을 잘 알고 있다(24, 32절). 그가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났다는 것은 자기 아버지와의 단절된 관계를 잘 나타내 준다. 그 결과 그는 사회적으로 멸시를 당하고, 도덕적으로 그리고 의식적( )으로 부정하게 된다. 거기다가 그는 자기의 가치를 모두 잃어 버린다(19절). 그의 아버지가 그를 일컬어 죽었다고 할 때(24절), 아버지는 마치 그가 죽었다는 듯이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그가 자멸의 길에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큰아들도 역시 잃어버린 아들이었다. 큰아들은 집을 떠난 일은 없었으며, 이것은 헌신과 정직의 모델이었다. 큰아들은 자기가 가정의 복지에 기여해 왔으므로 그만한 신분과 기업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확신하였다. 그런데 그의 동생이 돌아오자 자만심이 드러났다. 그는 인색함과 증오감 때문에, 연민의 정이 없이 마음이 냉랭했기 때문에 잃어버린 아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아들이었다. 뭐라고 해도 그들은 같은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둘 다 아버지의 사랑을 요구할 권리를 갖고 있었지만, 둘 다 그 사랑을 과소평가하였다. 둘째 아들은 품꾼으로서 아버지를 고용주로 모시고 그 아래서 일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17-19절). 그러나 그는 아들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발견하게 된다. 아버지 앞에서 채 말도 끝내기 전에, 아버지는 아무 꾸지람도 하지 않고서 그를 맞아 준다(21, 22절). 큰아들은 아들의 신분을 열심히 일을 해서 얻는 계약으로 본다(29절). 그리고 그 계약을 깬 둘째 아들을 징벌할 것을 요구한다(30절). 두 아들 다 아들의 신분이 자기들의 공로보다는 아버지의 사랑의 능력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이야기 마지막에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가서 그들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데리고 오려고 노력하는 것은, 두 아들이 모두 실패했다는 것과 아버지의 관대함을 잘 보여준다(20, 28절). 그들은 모두 선택을 해야 했다. 그 이야기는 작은아들이 집을 떠나기로 선택한 것으로 시작한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잃어 버릴 것을 감수한 사랑으로 그 선택을 존중해 준다. 나중에 둘째 아들이 집으로 다시 돌아오기로 한 결정은 큰아들로 하여금 선택을 하게 만든다. 동생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으니 혼자 나가 살까? 같이 살되 형제 관계를 그냥 부인하고 살까(30, 32절)? 만일 그렇다면 큰아들은 아들의 신분은 잃지 않게 될는지는 몰라도 그것을 누릴 생각은 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듣는 사람들에게 대답을 하도록 남겨 두시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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